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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 Jun 21. 2020

"가지 무침...어떻게 하는 거야?"

첫 외국생활에서 더듬어낸 집밥의 맛

"엄마! 가지 무침...어떻게 하는 거야?"

16시간의 시차에도 나는 굴하지 않았다. 나는 인생 첫 해외생활이자 첫 자취를 시작한 참이었다.


장소는 캐나다 밴쿠버. 태평양을 사이에 둔 아메리카 대륙의 낯선 동네는 내가 서울을 떠나 처음 살게 된 외국의 도시였다. 나는 대학교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그곳에 위치한 주립대학에서 두 학기를 보내게 되었다.


밴쿠버는 한식이 먹고 싶은 한국인 유학생에게 자비로운 곳이었다.

일단 시내 한복판에 대형 한인마트 체인이 있었다. 그곳에서 파는 밴쿠버산 김치는 여름이 서늘한 밴쿠버의 기후에서 길러낸 배추 덕분인지, 강원도 고랭지 배추로 만든 한국산 김치 뺨치게 맛이 좋았다. 반찬 코너에는 명란젓을 비롯해 각종 반찬도 다양하게 팔고 있었고, 그 당시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꼬꼬면도 금세 슈퍼에 구비되기 시작했다. 슈퍼에 딸린 식당에서는 즉석 떡볶이나 짜장면도 팔곤 했다. 무엇보다, 나는 내 생애 가장 맛있는 순댓국을 밴쿠버에서 먹었다.

요는, 그곳은 한식이 먹고 싶을 때 꼭 직접 요리해야만 하는 선택지밖에 없는 곳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주 거대한 장보기를 했다. 외국에서 자취하는 대학생에게 전혀 필요하지 않은 수준이었음을 고백한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면 내 양손에는 '요리가 필요한' 식료품이 한가득 들려있었다. 청양고추, 팽이버섯, 시금치를 비롯한 야채에 닭고기, 소고기와 같은 주재료가 될만한 것들. 그러고 나면 나의 요리가 시작되었다. 나는 기숙사의 부엌 천장에 온갖 양념을 쟁여두었다. 국간장, 매실원액, 통깨, 미림...내 찬장은 한국 집의 부엌과 닮아 있었다. 나는 그 공간에서 기억 속 집밥의 맛을 더듬거리며 찾아내곤 했다.

인터넷에 웬만한 조리법은 잘 나와있었지만, 요리가 익숙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한 숟갈' 같은 표현조차 어려웠다. 더군다나 내가 만들고 싶은 건 그냥 가지 무침이 아니라 '내가 먹던' 가지 무침이었기에, 인터넷의 조리법으로는 안심이 안되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한국에서 싸 간 인터넷 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16시간의 시차는 의외로 효율적인 시차여서, 내가 밴쿠버에서 저녁을 준비할 때쯤이면 한국은 정오 즈음이었기에 엄마에게 빠른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응. 아 삶는 게 아니야? 살짝 익히는 거야? 그래, 알겠어. 여기 밥솥이 있는데...그럼 살짝 찌면 돼? 양념은? 뭘 넣으면 돼? 매실액을 넣으라고? 고추장은 넣으면 안돼? 그럼 탁해져? 알겠어, 알겠어.


물론 아주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국간장과 진간장의 차이를 몰라 가끔 이상한 맛의 미역국을 끓여내기도 했고, 물 조절을 실패해 맹탕 같은 닭볶음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대개의 경우, 감사하게도 다진 마늘이 실패한 요리를 구원해주곤 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매번 마음이 즐겁고 따뜻했던 것 같다. 그 웃긴 음식들에는 무언가 그리운 게 있었다.


한식의 특징인지 몰라도, 이렇게 요리한 음식들은 대개 1인분 이상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같은 프로그램으로 와 있는 학교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와서 밥 먹을래?'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자주 식사회가 열렸다. 나는 서너 명의 친구들을 불러 마치 모두의 엄마가 된 것처럼 밥 한 끼를 대접했다. 간혹 실패한 그런 어설픈 음식도 친구들은 맛있게 먹었다. 나중에 한 친구가 "그때 네가 우리 모두를 먹여 살렸어. 넌 공덕을 쌓은 거야"라고 즐겁게 그때를 회고해주곤 했다.


뭐가 그리 신나서 1년 내내 그렇게 생전 하지도 않던 요리를 열정적으로 하며 지냈는지. 그때는 그냥 먹고 싶어서 했다고만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먼 타국에서 나를 위한 엄마의 맛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한국 친구들을 위한 가족의 맛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 기억 속의 맛을 직접 만들어내고 싶었고, 그래서 즐거웠고, 그 즐거움을 다른 친구들과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나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그곳에서 또 다른 가족을 내 힘으로 만들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엄마는 내가 그곳에서 하도 열정적으로 요리를 잘해 먹고 지내서, 내가 한국에 돌아오면 내가 밥은 다 해줄 줄 알았단다. 하지만 짐작하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그리워하며 흉내 내던 맛이 이제는 진짜로 존재하는데 그럴 필요가 있겠어?라고 웃으며 엄마를 놀렸다.

처음으로 익숙한 환경과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지냈던 외국에서의 시간. 그곳에서 내게 잠깐 깃들었던 요리의 영혼이 언젠가는 또 돌아올 것이다. 언젠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워 음식의 맛으로 그 그리움을 채우고 싶은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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