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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 Jul 12. 2020

스무 살에 대학생이 되지 못하면

근데 실패해도 별 거 아냐

한국에서 입시만큼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괴로움이 또 있을까 싶다. 누군가는 당사자로, 누군가는 부모의 입장으로 일생에 한번쯤은 그 과정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는 듯 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히 이런저런 실패가 동반되기 마련이다.


나의 상황도 그랬다. 

어느 2월,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수능을 엄청나게 망친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이제 곧 대학에 입학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또 미묘한 안타까움으로 날 대하는 선생님들을 뒤로 하고 난 재수종합학원을 등록했다. 접수를 하고 등록비를 수납하러 가던 그 날의 기억도 한 토막 떠오른다. 옆 창구에는 등록을 취소하러 온 아이가 있었다. 추가합격으로 대학에 붙어서 학원을 다닐 필요가 없어졌단다. 접수대의 언니가 진심으로 축하해주었고 그 아이의 목소리도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나는 묵묵히 접수비를 결제했다. 


학원은 학교와 똑같았다. 하루 종일 모든 수능 과목에 해당하는 수업을 소화했고, 점심 저녁 두 끼의 도시락을 챙겨가야 했으며, 늦은 오후즈음 수업이 끝나면 의무적인 야간자율학습이 이어졌다. 이 모든 과정은 5, 60명의 아이들이 빽빽히 들어찬 닭장 같은 교실에서 온종일 이어졌다. 

"여러분은 지금 국가가 공인하는 그 어떤 공식 기관에도 속해있지 않습니다."


3월 초, '담임' 선생님이 '정신 못차리는' 아이들에게 들으라며 그렇게 말했다. 에누리 없는 사실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이후로 우리의 사회적 지위는 항상 '학생'이었고 그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는데, 대학을 가지 못하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TV 드라마 속에서 어머니들의 골칫거리인 백수 막내삼촌이라도 된 것 같았다. 사회적으로 날 증명할 '이름'이 없다는 건 너무도 두려운 일이었다. 그 두려움은 아주 무겁게, 마음 속 깊숙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봄이 되었고 먼저 대학생이 된 친구들이 밥을 사주겠다며 위로차 방문했다. 그러나 그런 자리는 으레 의도치 않은 비참함으로 끝나곤 했다. 예쁘게 차려입고 예쁘게 꾸민 친구들은 눈부신 봄햇살을 쬐며 눈부신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모르는 세계였다. 같이 알 수도 있는 세계였는데, 어쩐지 한끗발 차이로 나는 그 세계가 낯설었다. 친구를 만나고 닭장 같은 교실로 다시 돌아오면 비참함은 더 사무쳤다. 


그 와중에 난 특별나게 철도 없었다. 부모님과 운동을 다니기로 약속했다며 그 엄혹한 분위기 속에서 자율학습을 면제받았다. 그리고 적당히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가 공부는 안하고 만화책을 들여다봤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부모님 속을 새까맣게 태우다 못해 지옥으로 보내는 수준이었다. 부모님은 너무 답답한데, 또 한소리 하면 내가 더 스트레스 받을까봐 한 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현실로부터 마구 도망치고 있었지 싶다. 내가 처한 상황과 해야되는 것이 있는데, 영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수능 점수를 크게 끌어올려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도 나의 안이함에 한 몫을 했을 거다. 


그렇게 몇개월을 철없이 보내고나니 모의고사 성적은 나의 태만을 정직하게 고발했다. 그간 공부해오던 것으로 어찌어찌 버텨오던 성적은 수능을 4개월 앞두고 반토막이 나있었다.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상투적인 표현이라지만 정말 '눈 앞이 캄캄해졌'다.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괴롭다며 한없이 도망치던 나의 두려움의 결과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남은 시간이라도 본분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나의 도피에는 1년 동안 같이 생활한 반 아이들과 전혀 친해지지 못했던 것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친구도 새롭게 사귀었다. 우리는 둘러앉아 도시락 반찬을 나눠먹고, 종종 자율학습 감독을 하는 대학생 아르바이트의 눈을 피해 땡땡이를 치며 작은 자유를 함께 만끽했다. 그렇게 두려움과 기대감 속에서 친구들과 가을을 보냈다. 


11월이 되어서 우리는 두번째 수능을 치뤘고, 나는 수시 전형에 지원했다. 욕심을 내서 정시 전형을 낼 수도 있었지만, 재수생의 입장에서 거기까지 가서 실패했을 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결과를 기다리며 어느 날 친구와 있는데 집에서 연락이 왔다. 오늘은 빨리 집에 들어오라며 올 때 케이크를 사오란다. 알 것도 같지만 함부로 생각하기 무서웠다. 케이크를 들고 귀가를 했고, 부모님은 미리 확인한 합격 결과를 알려주었다.

끝났다. 드디어 끝났어.


오직 그 기쁨만이 마음에 메아리쳤다. 이제는 더 이상 마음 졸이지 않아도 돼. 이제는 '무언가'가 될 수 있어. 





이젠 제법 오래된 이야기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교는 무결점의 천국이었는가 하면 물론 아니었다. 여전히 공부는 해야하는 일이었고 인간 관계가 대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쉬워질리 만무했다. 오히려 새로운 고민들이 정신 없이 쏟아졌다. 수업은 뭘 들어야 하나. 동아리는 뭘 가입해야 도움이 될까. 졸업하면, 뭐하지. 전보다 더 복잡한 질문들뿐이었다. 대학생이 되었다고한들 고작 한 살 더 먹었을 뿐인데 갑자기 전에 없던 지혜나 요령이 샘솟아날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더 좋은 입시 결과, 더 좋은 대학을 위해 꼭 1년을 더 쓸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 대학교조차 예전의 일이 되어버린 지금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그 시간을 이미 지나보낸 사람의 쉬운 감상일 거다. 스무 살이 되었는데, 남들 다 된 대학생이 못 되었다는 것은 비참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타인에게 나를 설명하는 게 어렵고 곤란한 기분이 들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닫기엔 스무 살은 좀 어렸다. 또 입시가 어디 한국에서 만만한 포깃거리가 되던가. 한국에서 일반적인 학제 과정을 밟는다면 12년 정도는 입시라는 목표를 향한 질주를 해야만 하고, 11월의 그 하루는 필사의 하루이다. 


그러나 무언가로 완결되었다고 생각한 순간들은 사실 매번의 다른 어려움도 새롭게 맞이하는 순간들이었다. 무언가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대학생 시절을 보내고, 또 무언가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취직을 하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실은 별거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랬다. 지금도 그럴진대,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질테다. 


그러니 입시든 무엇이든 누군가 인생의 중요한 장면을 마주하고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열심히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기를. 만약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지나치게 좌절하지 않기를. 그 장면 너머 펼쳐질 삶에 대해서도 충분히 볼 수 있기를. 그래서 매 장면마다의 괴로움 그리고 즐거움 또한 오롯이 누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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