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표 된장찌개
고모에게는 딸이 넷이었다. 마치 <작은 아씨들>에 등장하는 메그, 조, 베스, 에이미마냥 네 언니들의 성격은 제각각이었다. 잔소리가 심한 첫째 언니, 화려한 둘째 언니, 진지한 셋째 언니, 그리고 막내 언니. 아무래도 다른 언니들은 나보다 나이가 한참 위였고, 아직 고등학생 즈음이던 막내 언니가 어린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주었다.
언니는 만화를 좋아했고, 만화책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중학생이 된 이후 만화에 푹 빠져살던 나는 그래서 고모네 놀러가는 게 늘 설렜다. 나는 언니의 방에 배를 깔고 누워 좋아하는 만화의 최신본이 실린 만화잡지를 읽었다. 감질맛나는 분량이었지만 갱지로 인쇄된 두꺼운 만화 잡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는 그 세계로 흠뻑 빠져 들었다.
이 방문이 즐거운 건 만화가 유일한 이유가 아니었다. 다정한 언니와 만화를 들여다보며 정신없이 놀고 있노라면 어느 새 해가 뉘엿뉘엿 졌다. 그러면 고모는 시간이 늦었으니 저녁을 먹고 가야한다며 부산스럽게 저녁을 준비했다. 어쩌면 엄마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화에 정신 팔린 사이에 시누이와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거나. 한참 나이를 먹고서도 엄마는 시집은 늘 어렵다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돌아갈 수 없었다. 그것은 고모표 된장찌개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고모의 저녁 밥상은 이런저런 나물과 그야말로 집반찬이 주된 구성이었지만, 고모의 음식 솜씨가 좋아서 그런지 찬들은 한결같이 맛이 진했다. 지금도 그 밥상을 생각하면 '진짜 집밥'이라는 인상이 남아있다. 그 중 백미는 역시 된장찌개였다. 우리 집에서 엄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와 그다지 다를 게 없어보였는데도, 유독 더 입에 착 붙고 맛있었다. 재료도 특별날 것 없이 두부와 버섯, 호박 등등이 들어가는 평범한 된장찌개였는데 말이다. 한 번 그 찌개에 맛을 들이고나서는, 내가 고모네를 가고 싶은 게 막내 언니와 정신없이 즐기는 만화 때문인지 그 된장찌개 때문인지 스스로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왜 고모표 된장찌개가 그렇게 맛있는지 그 미스테리는 꽤나 오랜 시간 내 마음 속에 커다란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엄마보다 고모가 더 주부 경력이 기니까, 비슷한 재료로 같은 음식을 만들어도 더 잘하는 거겠거니 대충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 시간을 건너뛰지 못하는 이상 엄마가 고모와 같은 된장찌개는 끓일 수는 없을 거라며.
한참이 지나 우연히 이 오래된 의문을 엄마한테 물어보고나서야 그 비결을 알게 되었다. 답은 미원이었다. 미원이라니! 비결은 재료도, 솜씨도 아니었다. 식품 회사에서 정교하게 설계하고 배합한 조미료가 어린 나의 미뢰를 완전히 사로잡았던 것이다. 엄마는 그저 요리에 미원을 안쓴 죄밖에 없었다.
미원이라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가 그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은 제법 충격적이었다. 더군다나 그 차이를 솜씨의 차이라고 긴 세월 굳게 믿어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실망했는가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지금도 고모를 만나면 다시 고모의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고 말할 기분이 충만하다. 해가 저물어 어두워진 고모네 마루에 상을 깔고 앉아 후루룩 들이키던 그 국물의 맛은 비결이 뭐였던지간에 잊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던 건 사실이니까. 다만 엄마의 된장찌개를 짐짓 무시해왔던 게 조금 부끄럽고 머쓱한 일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