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 반죽의 기억
우리 엄마는 딸 부잣집의 넷째이다. 여기서 딸 부잣집이란 외삼촌은 한 명도 없이 오직 이모만 여섯이 있는 그런 수준이다. 그 시절 이런 자식 구성이라면 답은 딱 하나다-'아들을 너무도 원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함'. 윤흥길의 <장마>나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학교에서 배우고 있노라면 외삼촌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사뭇 궁금해지긴 했지만 크게 아쉽진 않았다. 엄마는 이모들과 사이가 무척 가까웠고, 나도 비슷한 또래의 이종사촌들과도 아주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외갓집 가족들과 어울리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었다(자주 어울리는 사촌들 중 내가 제일 손위여서 약간의 골목대장 노릇이 가능했던 것도 재미의 일부였을지 모르겠다).
특히, 엄마 바로 손아래의 이모와 어릴 적부터 아주 가까웠다. 엄마는 일을 했었고 이모는 가정주부였어서, 학교 다닐 적 방과 후에는 엄마가 퇴근하기 전까지 나는 이모네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이모는 간식을 내어주었고 나는 숙제도 하고 사촌동생과 놀면서 엄마를 기다렸다.
내가 기억나는 시점부터 이모의 취미는 베이킹이었다. 이모네 집에 놀러 가면 식탁에는 항상 미세한 밀가루가 소복이 깔려 있었고, 거의 대부분은 오븐의 후끈한 열기와 함께 빵 반죽이 익어가는, 세상에서 제일 기분 좋은 냄새가 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먹보였던 나는 자연스레 이모의 취미에 동참하게 되었다.
몇 가지 적을 만한 메뉴에는 이런 게 있다:
초코소라빵
이 메뉴의 핵심은, '시판 소라빵에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양의 크림을 듬뿍 넣는' 데 있었다. 파리*나 뚜레* 혹은 그 어떤 빵집이 되었든 늘 소라빵은 먹다 보면 입구에만 야속하게 몰려있는 초코크림이 문제였다. 그러고 나면 꽁무니는 맨 빵을 먹어야 하는 슬픔. 그러나 집에서 만드는 빵에 그런 요령은 있을 수 없다. 무조건 크림은 빵 끝으로 삐져나올 때까지 꾹꾹 채워 넣는다.
옥수수빵
옥수수빵은 그야말로 추억의 맛인데, 나는 이것을 '가난한 맛'으로 부르고는 한다. 요새 옥수수빵을 사먹으려면 옛날 빵을 만드는 빵집에나 가야 있을까 말까인데, 옥수수빵은 때때로 생각나는 빈곤한 매력이 있어서 늘 그 존재가 아쉽다. 빵 속에 촉촉한 옥수수가 들어있다거나 하면 사치스러운 느낌이 드므로 안된다. 목이 메여오는-그래서 꼭 흰 우유가 필요한-그 답답한 맛. 빵 겉에도 옥수수 가루를 잊지 않고 묻혀 주는 뻑뻑함. 이모가 가장 잘하는 메뉴이기도 해서 이 빵은 항상 기대된다.
마카롱
그렇게 자주 만드는 메뉴는 아니지만, 이것의 핵심은 '밖에서 사먹으면 개당 최소 삼천 원은 드는 애지중지 마카롱을 양산형으로 마구 찍어내서 속 편하게 먹을 수 있어!'에 있다. 마카롱이 대체로 비싼 것은 마카롱은 밀가루가 일절 들어가지 않고 아몬드 가루가 주재료로 쓰이기 때문이다. 요는 원래도 원가가 조금 비싼 메뉴라는 것이다. 그래도 집에서 만들면 질이고 뭐고 간에 마음껏 짤주머니로 짜서 몇 판씩 가득 만들 수 있는 데 그 매력이 있다.
그 밖에도 이런저런 메뉴를 많이도 시도했다. 제일 만만한 건 스콘. 밀가루1/3 버터1/3 설탕1/3이라는 직관적인 재료 구성(그렇습니다, 버터와 설탕이 저렇게 많이 들어갑니다)과 발효가 필요 없는 제과라는 점 때문이었다. 나의 짧은 해외 생활 이후에는 할로윈의 추억이 담긴 펌킨 머핀이나, 프랑스 친구가 손수 알려준 초콜릿 타르트, 사과와 흑설탕 그리고 시나몬이 듬뿍 들어가는 향긋한 애플 크럼블을 만들면서, 이모와 함께 내 추억을 되새김질도 해보았다.
이모와 빵을 만들 때 늘 장난 삼아 하는 습관이 있었다. 베이킹은 생각보다 고되고-설거지감이 어마어마하게 나온다-기다림도 많다. 그래서 중간에 반죽하던 밀가루를 조금씩 떼내 먹어보곤 했다. 반죽이 잘 되었나 보겠다는 핑계인데 사실 반죽을 먹는다고 그걸 정확히 알 길은 없다. 아니면 주걱으로 아무리 잘 떠내도 보울에 조금씩 남는 반죽이 아까운 게 컸던가. 밀가루 반죽을 먹어본 적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묘한 맛을 알지 모르겠다. 약간 차가운 온도의 말랑한 젤리 같은 식감에 버터와 설탕-아무리 다양한 재료를 넣어도 결국 느껴지는 건 항상 이 두 가지이다-으로부터 올라오는 은근한 고소함과 달콤함.
밀가루 반죽 그냥 먹으면 안 돼, 배탈 나!
밀가루 반죽은 유해한 걸 먹는다는 희열도 선사했다. 아니면 이모가 매번 기겁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게 재밌었을지도 모른다. 재미로 시작한 노동을 지루하게 이어가며, 이모에게 구박을 받으려고 그 은근한 맛이 주는 죄책감을 한껏 즐겼던 것 같다.
이모와 보내는 시간은 내가 제법 나이를 먹을 때까지 이어졌다. 더 이상 방과 후에 맡겨질 필요가 없던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까지도 나는 일주일에 한 번은 자발적으로 이모네 놀러 가곤 했다. 대학교 시절 야심차게 주4-일주일에 4번만 학교를 갈 수 있도록 시간표를 잘 짠 경우-를 하거나 금요일 오전이면 수업이 모두 끝나는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친구를 잘 못 사귀는 나의 고질병 때문에 그 멋진 일정에도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어 이모네로 달려갔다. 하릴없이 라면을 까먹고 베이킹을 도와주는 시늉을 하면서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못난이 딸 역할을 했다.
이모는 정말 착한 사람이라 언제도 내 한량 같은 방문을 싫어한 적이 없었다. 늘, 벨을 띵동 누르면 이모는 빼빼 마른 몸에 편안한 옷차림으로 반드시 손에는 비닐장갑을 끼고 있거나 아니면 실리콘 주걱을 들고 그 문을 열어 주었다.
작년에는 엄마와 이모와 함께 셋이서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파리에서 시작해 남프랑스를 렌트카로 자유여행하고 바르셀로나에서 마치는 일정이었다. 패키지여행도 아니고 보름 가까이의 모든 일정을 내가 손수 짠 자유 여행이었다. 불편한 것 투성이인 유럽을 50이 넘은 할머니들...이 아니라 아줌마 둘과 가려니 가기 전부터 나는 초비상이었다. 여행 시간보다도 더 긴 시간을 여행 준비에 썼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우리는 모두의 이견 없는 취미 생활인 먹는 데에 정말 많은 공을 들였다. 미슐랭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도 몇 개씩 일정에 넣었다. 그중 한 군데는 사전에 예약금을 요구할 정도로 까탈스럽게 굴기도 했고, 신나서 예약은 했지만 계산서를 받으면 높은 가격에 마른침을 삼키게 되는 가게도 있었다.
무엇보다, 매일 아침 바게트를 새로 사 먹었다. 프랑스는 정부 정책에 따라 바게트에 한해서는 대체로 1유로 정도의 가격대를 반드시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이지만 나는 전날 남은 바게트가 아까워 아침마다 새로 바게트를 사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순한 이모는 그런데도 꿋꿋하게 아침마다 새 바게트 사기를 고집했다. 뿐만 아니라 매일 다른 집의 바게트를 맛보고 싶어 했다. 음식 남기는 걸 마뜩지 않아하는 나는 이모의 뜻밖의 고집이 놀라웠지만, 갓 구운 바게트를 길에서 뜯어먹으며 행복해하는 이모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행복해졌다.
어찌 되었든 즐거운 순간이었고, 곱씹을수록 더욱 즐거운 순간이었다(코로나로 인해 이런 삶은 이제 꿈꿀 수 없는 올해 들어서는 셋이서 얼마나 이 얘기를 하고 또 했는지 모른다).
즐겁지만 매우 지친 상태로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던 날, 세관을 지나 작별 인사를 하려던 차 이모는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정말 수고 많이 했어. 덕분에 즐겁게 잘 놀았다.
말했던가? 이모는 정말 착하지만 스킨십은 극도로 싫어한다. 늘 살을 부대끼고 사는 나로서는 적응이 안될 정도로 사람과 닿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종종 이모에게 와락 팔짱을 끼는 장난을 치면 이모는 질겁을 하면서 도망치고는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먼저 포옹을 해주다니.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공항버스에서 나는 엉엉 울었다. 더 잘 준비할 걸. 짜증 내지 말걸. 힘들어하지 말걸. 딸들이 엄마들에게 하는 후회는 항상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