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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Sep 26. 2022

딸의 유치원 선생님을 껴안고 울었지 뭐야

내 사회생활보다 울컥한 딸의 첫 사회생활 


나의 딸아이는 네 돌이 지나고 나서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민자로서 타국살이를 하는 많은 한인 엄마들이 걱정하는 것은 바로 언어 문제일 것이다. 딸이 네 살이 되는 동안 나는 딸과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낼 수 있음에 감사했으나, 동시에 불안했다.


친구들을 좋아하는 딸은, 집 앞 놀이터만 나가도 이 아이 저 아이에게 당당히 한국어로 말을 건네며 졸졸 쫓아다녔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너 무슨말 하는거야?" 라는 리액션과 도리도리 흔드는 고개들.


친구가 고팠던 모양일까, 유치원에 첫 등교하는 날, 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이따가 늦게 데리러 와." 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노룩 등교를 하며 신나하던 딸은 어느 순간부터 집에 와서 종종 짜증을 내기도 해서, 첫 등교 후 한달 동안은 픽업하러 갈 때 가슴이 두근두근한 상황이 자주 연출되었다.


픽업하러 가면 이틀에 한번 꼴로 선생님의 진지한 표정을 마주하게 되었고

ㅇㅇ이가 오늘은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집에서도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울고 떼를 쓰는지,

울고 떼쓸 때 어떻게 대처 하시는지,

등등

내게 여러가지 질문을 하셨다.


사실 우리 딸은 잘 떼를 쓰지 않고

말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없던 아이였기에,


언어에 어려움이 있어서 그런것같다고

조금만 참아 달라고,

"Please bear with her."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당연한 것이니까.

말이 안통한다는 불편함을 유학생이었던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데, 이 어린 아이는 얼마나 더 불편했을까.


선생님 또한

아마 언어가 잘 마음대로 표현되지 않고, 친구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게 답답해서 그랬을 거라고,

엄마인 나를 오히려 격려해주셨다.



그렇게 수개월이 흘러갔고

어느새 영어를 모르던 아이는 졸업식도 하고

친구들에게 농담따먹기도 하며 모두를 웃기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교사 경력을 시작한 담임 선생님은 종종 아이들이 벌써 이만큼 컸다며 눈시울이 붉어졌고

우리 아이에게도 그분이 첫 선생님이었기도 했으니 서로 특별한 셈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학교를 떠나는 날,

전날 새벽까지 만든 간식 트레이를 건네주며 평소 알고지냈던 학교 선생님들과 한명씩 인사를 했다.


웃으며 한명 한명 인사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아이 담임선생님을 보는순간 눈물이 터져버렸다.


눈물이 진짜 없어서 본인 졸업식때도 한번도 울어본 적 없고 오히려 이별의 순간 우는 사람을 달래주던 나였는데, 정작 아이의 이별의 날 쿨하지 못한 엄마가 되었다.



아마도 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 눈물로 흘렀던 것 같다.

타국 땅에서 언어도 미숙한 아이를 맡겨놓고 난 뒤느꼈던 불안함, 아이가 첫 사회생활을 언어와 문화가 다른 환경에서 무사히 잘 적응했다는 안도감, 학교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우리 모녀를 처음부터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유치원이었고 선생님이었다는 데에 대한 감사함.


                    

평생 잊지 못할  딸의  사회생활은 타국 살이를 하는 초보 엄마의 마음속에  성적표와도 같은 것이었을까.


주책없는 초보 엄마를 꼭 안아준 딸의 첫 담임 선생님의 따뜻함을 느끼며, 평생 사회생활 하며 겪은 다양한 이별의 순간에도 이렇게 운 적이 없었는데 부모 자식 관계는 이토록 특별한 것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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