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들이 제대로 발성하는 법을 가르치는 장으로서의 가정
여성들은 제일먼저 가정 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배운다' 가 아닌 '배워야 한다'로 적은 이유는 아직도 많은 가정에서 여성들은 목소리 내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다.
딸들은 가정에서 목소리 내는 법을 배워야 공적 영역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운다. -설사 그 공적 영역이 여성을 억압하는 문화와 사회 시스템일지라도- 여성은 언제든 필요한 경우 자신의 처한 상황과 자기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빌드업해서 자신의 주장과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배우는 곳이 바로 가정이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유교적 가부장제 하에서 나를 포함 많은 여성들은 가정 내에서조차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가정 내 토론이 활발하거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가정환경이라 할지라도 딸들은 기본적으로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하는 한도 내에서 토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부모가 해야할 <훈육>이라는 카테고리와는 다른 영역의 것이다.
훈육은 설득의 영역이고 교육의 영역이다. 사람으로서 마땅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 훈육이다. 해야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은 토론의 영역이 아니다. 이를 헷갈려선 안된다.
소녀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목소리낼 수 있게 하려면 가정에서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은연중에 아버지의 포지션이 높아져 있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가장 유효한 목소리라면 애초에 토론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다.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는 얘기다.
많은 부모들이 딸들에게 아들 못지않게 기초체력을 기르도록 함께 운동도 하고 영양도 신경써서 균형잡힌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돕는다. 그러면서 딸들이 사회에 나가 기본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초는 길러주지 않는다. 우리 딸들이 어떻게 깊이있는 생각의 논리를 구성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어떠한 목소리로 발성해야 할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아들들은 청년이 되기 전 한번은 아버지를 이겨본다고 한다. 그러나 아빠를 이기는 딸들은 주변에서 쉬이 보지 못한다.
딸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내 의견 안에서로 한정지어선 안된다. 아이가 커갈수록 점점 더 훈육의 비중은 줄어들고 아이의 목소리를 응원해주어야 한다. 동등한 위치에서 딸들이 나름의 생각과 논리를 정립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발성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어야 하는게 부모의 역할, 특히 아버지들의 역할이다.
나를 포함 우리의 윗세대는, 자녀에게 눈 맞춰주고 자녀의 목소리를 용인하면 부모로서의 권위가 사라지는 줄 아는 아버지들과 함께 자라났다. 결과는 대화의 단절, 침묵이다. 목소리를 내도록 격려받지 않은 딸들은 더이상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소녀들은 또래 남성들 또는 성인이 되어 맺는 로맨스적 관계, 부부관계 속에서 주도권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소리를 내면 관계를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죽이고 원치 않는 관계로 들어가거나 사회에서 필요할 때 목소리를 낼 수 없다. 가정에서도 해보지 않은 것을 사회에서 할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어릴때부터 우리 집 안에서는 누구도 아버지의 말에 대항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할때만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며, 아버지의 의견에 부정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같은 불같은 성정의 나는, 부들부들 떨거나 때론 감정이 격해져 아버지의 의견에 곧장 반대했지만 그것은 극히 제한적인 영역, 이를테면 나의 진로나 나의 행복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일 때만 그랬다. 나는 제한적으로 목소리 내는 법을 배웠다. 덕분에 나는 사회, 정치, 경제 등 다양한 영역에서 아버지와 활발히 토론하는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집은 조용했고, 식사시간이 불편한 나는 제일먼저 식사를 끝내곤 방으로 돌아오는 딸이었다.
나는 가정에서 목소리 내는 법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타고난 성질머리 때문인지 공적인 영역에서 곧장 내 이익과 관련된 문제나 아니다 싶은 것들을 목소리 내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한켠에 늘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선 내 목소리를 경청하는 좋은 남자를 만났다. 그럼에도 가끔은 내 생각을 정리하여 효과적으로 목소리 내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느낄때가 있다. 그럴때면 언제나 어릴적 기억이 연기처럼 뇌리에 피어오르기도 한다. 음, 내가 그렇게 자랐었지. 그래서 이렇게 불편함이 느껴질 때가 있지. 그러나 나이 먹는게 좋은 점 중 하나는, 인생에 대한 지혜와 노하우가 쌓인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목소리 내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유년시절에 아버지와 즐거이 토론하는 기억 따윈 없어도, 지금의 내가 의식을 가지고, 성찰하고, 목소리 내는 법을 배우고 개발할 수 있다는 것.
내 남편은 가부장제와는 거리가 먼 편에 속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유교 문화권에서 자란 남자사람이라, 가끔씩 묻어나오는 가부장제의 일면들이 있다. 그것은 딸을 키우는 자상한 요즘 아빠라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어떠한 오래된 습관 같은 것이다. 그럴때마다 똑똑한 요즘 엄마로서 짚어준다. 우리 딸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갖추어야 하는 기본기에 대해, 그것을 장착해줄 우리의 의무에 대해.
딸을 키우지만 나도 완벽한 여성은 아니다. 완벽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지도 못했고, 목소리 내는 것을 주저할 때도 많고 불편할 때도 많은 여성이다. 완벽하고 싶지만 우리의 가정은 절대 완벽할 수 없다. 그저 잘 안될땐 하루쯤 그냥 숨을 고르고 내일 다시 시도하면 되는 것이다. 시청각장애를 가진 부모가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사례들을 다큐멘터리로 본 적이 있다. 부모란 그런 것이다. 내가 목소리 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어도, 비록 내 환경은 완벽하지 못했어도, 아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키울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햇살이 모두에게 공평한 것처럼,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우리 딸들이 제대로 발성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