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수화기 속의 목소리
박사생 시절 나의 지도교수님은 50대 백인 여자 교수님이셨다.
교수님은 육아를 하고 커리어가 다 끊긴 40대 넘어 공부를 시작하셔서 박사 졸업을 하시고 교수가 된 분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빛나는 지성과 발전을 거듭하시는 분이셨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쯤, 남편의 직장 때문에 해외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프리카 근방 지역이었던 것 같다) 지역에 머무는 동안 가정주부로서 아이를 키우며 가정의 살림을 주로 돌보시던 교수님은 어느 날 집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Where is your master?"
그 나라는 남편을 "주인 (Master)"이라고 부르는 문화를 가진 나라였고, 수화기 속의 남성 목소리는 교수님에게 남편이 어디 있냐고 물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단번에 그 뜻을 알아챘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며 물었다.
"누가 Master 죠? 이 집에는 Master 가 없는데요."
수화기 속의 목소리는 당황하는 듯하더니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수화기 속의 남성은 몇 번 더 Master를 찾았지만, 한결같은 교수님의 대답에 교수님의 의중을 알아채고는 드디어 고쳐 물었다.
"Where is your husband?"
그제야 교수님은 남편은 잠깐 외출 중이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가부장제가 우리 사회 시스템과 문화와 정신에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혀있는 세계다.
태연한 무례함, 무지한 무례함, 혹은 모르는 척 잡아떼기.
여성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마주하는 것들이고, 끊임없이 악몽을 떨쳐내듯 떨쳐내야 하는 현실이다.
불편한 전화 한 통,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이러한 일화는 여성들이라면 주머니에서 츄파춥스 꺼내듯 한두 개 정도는 우습게 꺼낼 수 있을 것이다.
한두 번 아니 여러 번 이런 상황을 마주하지 않은 여성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미 수천 년 동안 형성된 가부장적인 사회 시스템과 문화가 너무 당연한 듯이 우리 생활에 침투할 때, 여성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평온한 일상을 살다가도 불쑥불쑥 나타나는 불청객이다. 때로는 거대한 벽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불편함은 생각을 형성하고, 생각은 응축된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불편함은 생각을 형성하고, 생각은 응축된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여성들은 그 목소리를 품고 있다가 언젠가는 세상에 내보낼 것이다.
당장은 나타나지 않지만 환경과 기회가 되면 터져나갈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나의 작은 목소리가 저 벽에 닿기나 할까?
현실의 벽 앞에서 여성들은 좌절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벽을 주먹으로 치지만 피투성이가 된 주먹이 벽보다 먼저 으스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도교수님은 여성에 대한 연구보다는 주류 학계가 원하는 연구를 해나가시며 명성을 쌓으며 계속 올라가고 계신다. 그러나 그분도 때가 되면 그분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단순히 나의 추측이나 희망이 아니다.
환경과 기회가 닿는 시점, 그분 안에 응축된 목소리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무작정 덤벼들 만큼 여성들은 그리 멍청하지 않다. 여성들은 강하고, 또 영리하다.
각자의 삶에서 기회가 오면 반드시 터져 나올 목소리를 지닌 채 살아간다.
단순히 기분이 나빠서일 수 있으나,
우리의 딸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 여성들은 불편한 전화 한통을 가벼이 답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다.
우리 앞의 여성들이 후대의 여성들을 위해 그래왔던 것 처럼.
나는 내 딸들이 살아갈 세상, 아니, 딸들과 함께 살아갈 세상을 위해 어떤 생각과 목소리를 내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