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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an 29. 2020

생각의 사치 그리고 삶

아침에 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에 비친 후줄근한 모습을 엿봅니다. 베개에 눌린 머리, 튀어나온 똥배, 반쯤 감긴 눈, 목 밑에 검은 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침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출근할 곳이 있어 양치하고 면도하고 샤워할 수 있어 감사하고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나오는 집이 있어 감사해합니다.


그러다 문득 이 또한 사유의 사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의 사치, 말장난일까?

산다는 것은 처절한 삶의 현장입니다. 에너지 확보를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밥을 먹어야 하고 추위에 떨지 않기 위해 불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 기본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감사는 그저 사치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당장 이 아침 눈을 떴는데 바깥의 저 추위가 피부에 닿아 있다고 생각하면 눈뜸에 감사해하지 않을 것이며, 세수하고 샤워하는데 얼어버린 수도꼭지를 녹여야 한다면 그 상황에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감사하다는 마음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등장하는 용어가 아닌가 합니다.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녹이고 있고 영하의 바깥 기온에 발가벗고 서 있는데도 감사하다는 말이 나온다면 그 상황이 정상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삶의 끝단에 서 있음조차 감사하다고 한다면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일견, 일체유심조의 심정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의 중요성을 거론할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먹기 따른 것에도 삶의 기본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전제는 반드시 성립합니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처절한 삶의 현장 속에서 살아남아 잉여의 여분을 쥐고 있을 때 여유라는 것이 찾아오고 감사의 마음도 싹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잉여라는 여분을 쥐기 위해 새벽 찬 공기를 뚫고 집을 나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으로 삶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내야 하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사치 너머로 생존의 강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은 138억 년 전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느냐는 질문과 같이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 물음입니다. 세상에 오고 싶어 자기 의지데로 세상에 온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던져지듯 무한대의 확률 속에 등장을 하고 생명을 얻었다 하고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탑니다.


우리는 주어진 삶을 잘 살면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인문학적 정의는 각자의 몫입니다. 비교할 필요도 없고 비교대상도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할 것이고 그렇게 해 낼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살아있는 동안 목표이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가슴속에 있는 뜨거운 열망과 열정 같은 폭발입니다. 식지 않고 간직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칼날같이 파고드는 바깥바람의 차가움도 거뜬히 이겨낼 강철 같은 튼튼함입니다.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여 포옹할 수 있는 여유가 생각의 사치가 아닌 현실의 효용이길 바라봅니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주어진 시간을 본인 의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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