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고흥.
서울서 참 멀기도 하다. 서울서 400km가 넘는 거리로, 자동차로 5시간을 달려야 다을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한 번도 들러보지 못했다. 아니 핑계다. 호주도 다섯 번을 갔고 일본은 열 번도 더 갔다. 올해만도 해외를 다섯 번이나 나갔고 그중 일본을 다시 두 번을 갔으니 말이다. 세계여행은 그렇게 잘 다닌다고 자랑질을 했는데 막상 국내 발 밑은 많이 보질 못했다.
여행을 통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고 있는가? 허황된 자랑질에서 벗어나 눈을 국내로 돌려보자. 숨어있는 명소가 곳곳에 널려있고 그렇게 찾아 헤매는 맛집들이 알알히 박혀있다. 대한민국은 정말 눈이 즐겁고 입이 행복한 곳이 틀림없다. 내가 안 찾아다니기에 모를 뿐이다.
이틀간의 고흥여행은 천경자와 만나는 행운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올해가 천경자 화백의 탄생 100주년이다. 그래서 천경자 화백의 고향인 고흥에서 '찬란한 전설,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이 열렸는데 개막식에 지인의 초대로 가게 됐다.
처음 초청 제의를 받았을 때 "고흥? 에이씨 너무 먼데!"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사실 천경자 화백의 그림은 그동안 수시로 볼 수 있는 특권이 나에겐 있었다. 다름 아니고 서울 정동에 있는 시립미술관에 천경자 화백이 기증한 작품 93점이 전시되어 있는 '상설전시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건물이 시립미술관 바로 뒤에 있던 관계로 점심시간 때면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러던 나에게 고흥에서 천경자 화백의 특별전이 열린다고? 크게 끌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인들의 꼬드김에 넘어갔다. "천경자 화백의 따님이신 수미타 김 선생님이 이번에 총감독을 맡아서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단과 개인 분들에게 연락해서 한꺼번에 모은 단독 전시래, 가는 김에 보성, 순천 들러서 맛난 것도 먹고 얼마나 좋아!"라는 감언이설이었다. 사실 이것도 핑계다. 정년퇴직하고 백수 된 지 열흘째라 남는 게 시간밖에 없어서 가차 없이 부름에 응했을 뿐이다. 그렇게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던 찬란한 천경자의 그림들과 만났다.
천경자 화백이 누구고 어떤 그림이 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한국 현대미술사를 찬란하게 장식한 여류 화백의 독보적 정점에 계신 분이니 말이다. 이번 특별전에서 눈에 들어온 작품은 전시실 첫 입구에서 만나는 1982년작 '길례언니'와 일곱 번째 주제 '찬란한 전설' 구역에 있는 1978년작 '탱고가 흐르는 황혼'이다. 그리고 아카이브 섹션에 놓여있는 천경자 화백의 육필 편지다. 가족들에게 보낸 우편엽서와 교류했던 문인들에게 보냈던 편지들이 빛바랜 누런 편지에 꼭꼭 담겨있다. 그림 솜씨와 더불어 글재주도 뛰어나서 '꿈과 바람의 세계'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이 행복하고 한적한 매혹의 시간에' 등 무려 10권에 달하는 책을 내기도 했다. 글을 맛깔나게 쓰는 능력이 그림의 예민한 붓터치로 표현되는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진정한 창작가이지 싶다.
'찬란한 전설,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은 12월 말까지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천경자 화백 정도의 명성임에도 아직 이름을 단 미술관이 없다는 것이 아쉽고 90점이 넘는 미술품을 기증받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런 의미 있는 행사를 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나지만, 특별히 천경자 화백의 고향에서나마 그림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만난 것만으로도 남도의 맛집과 볼거리들은 부수적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여행에서 무엇을 만나는지가 그 여행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 맛있는 남도의 곰삭은 풍미도, 가을의 정취를 내려놓은 산사의 풍광도 천경자의 그림 속에 숨어있음을 발견한다면 가슴 설레는 일이 틀림없을 것이다. 멀지만 기꺼이 발걸음을 할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