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찾아오는 증상들 중에 노안(老眼 ; Age Related Farsightedness)이 있다. 노안도 사람 따라 찾아오는 시기가 천차만별이긴 하나 40-50대부터도 온다고 한다.
노안은 말 그대로 눈의 퇴행성 변화로 인해 수정체의 초점 조절력이 떨어져서 발생한다. 가까운 거리의 글씨나 사물이 흐려 보이는 현상이다.
나는 매년 건강검진을 할 때 측정하는 시력검사를 하면 양쪽 시력이 1.0이 나온다. 지난 9월에 했던 시력검사에서도 각각 1.0을 기록했다. 약간의 난시가 있어 20여 년 전에는 난시안경을 한 2-3년 착용했었는데 평상시에는 끼지 않고 저녁에 운전할 때만 잠깐씩 썼다. 해지고 어두운 길에서 마주하는 교통신호등 불빛이 멀리 서는 번져 보여 혹시나 신호를 제대로 못 볼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러다 대충 적응이 되어서 그랬는지 난시안경을 안 쓰고도 그럭저럭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 운전하거나 일상생활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골프장에 가면 남들이 친 드라이버 샷이 어디로 어느 지점에 떨어져 있는지 정확히 판별해 낼 정도다. 대략 230미터 안팎으로 떨어지는 공은 거의 정확히 보인다. 퇴직하고 '시니어 캐디'를 하면 잘할 수 있을 거란 착각이 들 정도다. 동반자들이 다들 "외! 저게 보인다고?" 할 정도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 가까이 있는 것들을 판별하는데 슬슬 문제가 온 듯하다. 일상생활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책을 읽거나 라면이나 과자봉지 영양정보나 조리법, 약국에서 산 약봉지 성분표, 전자제품 사용설명서에 작은 글씨로 쓰여있는 것을 보는 게 문제다. 특히 술자리에서 소주병을 들고 "알코올 도수가 몇 도야?"를 물을 때 소주병 레이블에 붙은 알코올 표시가 16도인지 17도인지 안 보인다. "야! 그냥 마셔! 도수 안다고 덜 마실 것도 아니면서"하면서 그냥 술을 따라주고 만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에 좀 씁쓸하다. 결국 늙었다는 것을 신체가 증명하는 있는 셈이다. 60년을 썼으니 오래 쓴 것은 맞지 싶다. 이젠 보정하고 조절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더 이상 고장안나게 잘 써야 할 텐데 걱정이다.
그래서 지난주, 아는 지인이 하는 명동의 안경점을 찾았다.
"형님! 늦게 찾아오신 겁니다. 건강한 신체를 전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려야 해요"라며 돋보기안경 사용법을 알려준다. "어르신들이 안경을 콧등에 걸고 신문을 내려 보시다가 안경 윗 너머로 쳐다보며 부르시잖아요? 돋보기안경 쓰면 정확히 그 상황이 됩니다. 시야 초점이 돋보기에 맞춰져 있다가 멀리 보면 먼 사물이 잠깐 잘 안 보여서 그렇습니다. 그만큼 수정체 조절능력이 떨어져서 그래요. 최근에는 다초점 렌즈로 하기도 하지만 형님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돋보기 쓰시고 2-3시간 넘게 책 읽지 마시고 중간중간 쉬세요. 이제부터 눈 관리한다고 생각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게 책상 위에 안경, 그것도 꼰대들에게나 필요하다는 돋보기안경이 놓였다.
그런데 아직, 돋보기안경을 맞춰서 장만해 놓고도 손이 가질 않는다. 일주일 지났는데 그냥 책상한쪽에 놓여있는 장식물의 역할만 하고 있다. 노트북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을 때도 옆에 돋보기안경이 있음에도 굳이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그렇다. "저거 없어도 책 읽는데 문제없고 노트북 작업하는데 문제없어!"를 강변하고 싶은 반항심이랄까? ㅠㅠ 아직 늙지 않았음을 항의하고자 하는 반동이지 싶다.
부질없는 반동이자 반항심이라는 것을 책을 펼치는 순간 깨닫는다. 돋보기를 쓰는 순간 선명한 글씨가 살아서 눈에 쏙쏙 들어온다.
받아들여야지. 늙음은 반항한다고 물러나는 것도 아니다. 늙으면 늙는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맞춰 가면 된다. 돋보기를 써서 선명하게 볼 수 있어 뚜렷한 기억을 축적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맞춰가는 것을 늙는다고 한다.
돋보기안경 앞에 겸손해짐을 눈치챈다. 산다는 것은 참으로 그러하다. 신체 능력에 맞게 보정하고 조정하여 적절히 사용하는 것. 그것이 내 몸 사용 설명서에 대한 용법을 아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첫 경험이다. 맞춰 살아보자.
갑자기 어머니의 바느질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애야! 바늘귀 좀 끼워줄래!"라고 부르시던 모습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