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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l 02. 2020

사유와 실천의 차이, 동양과 서양의 차이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밖에 비가 오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장마철이 되면 찾아오는 체크포인트입니다. 칫솔을 물고 베란다로 나가 천기 운세를 살핍니다. 구름의 색이 어떤지에 따라 비가 올 것인지, 온다면 언제쯤 올 것 같은지 가름해봅니다. 구름은 잔뜩 끼어있지만 비로 내려올 것 같지는 않은지도 짐작해봅니다. 오늘 아침의 천기 운세를 직접 살펴보니 밖은 온통 회색에 포장되어 있습니다.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짙은 구름의 장막 아래 멀리 바라보이는 산은 물안개가 휘감고 있습니다. 수묵화의 전경, 이 아침 밖의 풍광입니다.


'비'라는 상선약수의 정체는 그런 것입니다. 시간과 상황에 따라 존재의 모습을 맞춰가는 탁월한 적응력을 보여줍니다.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되며 심지어 태양 아래 두면 홀연히 사라지기도 합니다. 있지만 없는 듯, 없는 것 같지만 있는 그야말로 신출귀몰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불리는 용어도 '비' '소나기' '강' '바다' '시냇물' '폭포' '장마' 등 셀 수 없이 많은 형태로 불립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물입니다. H2O입니다. 생명의 본연입니다.


여름 깊숙한 시간에 불현듯 찾아온 예전의 친구처럼, 안 오면 섭섭하고 가면 아쉬운 그런 존재로 '비'라는 형태의 물은 여름을 채우고 있습니다. 한여름 더위에 지나가는 비는 말 그대로 단비의 역할을 합니다. 체감온도를 내려줍니다. 높은 기온이라면 습도를 높이는 역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역작용보다는 긍정의 작용이 더 강합니다.


저 낮게 드리운 회색빛 구름 너머에는 쨍쨍한 햇살이 대기 중입니다. 잠시 구름에 가려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구름이 걷히고 태양 에너지가 온전히 대지로 전달되는 때가 되면 생명의 활동도 전자의 이동을 재촉할 것입니다. 자연에서 태양만큼 아가페적인 사랑을 주는 대상은 없습니다. 태양은 순환을 원하지도 않으며 무조건 내어주기만 합니다. 그래서 태양과 어머니의 사랑을 동일시하기도 합니다. 무한히 내주는 사랑을 어떻게 받느냐는 것은 오롯이 받는 사람의 몫입니다. 적게 받을 수 도 있고, 많이 받을 수 도 있고, 적당히 받을 수 도 있습니다. 선택은 본인이 스스로 하는 것이지요. 공자가 역설한 '중용'의 도가 자연을 그대로 대변하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현대 자연과학과 기술이 근래 인간의 지적 능력을 발현하고 우주로 나아가는 대 개벽을 이루고 있지만 동양 문화권은 그 언저리에도 못 미치고 있었습니다. 지구 밖으로 우주선을 내보내는데 동양은 1%의 기여도 못했다는 사실만 봐도 자괴감을 들게 합니다. 지금은 중국이 서양 기술을 복사하여 달의 뒷면에 무인 우주선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바로 17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현미경과 망원경의 발달을 희랍시대부터 발전시켜온 수리학과 기하학에 힘을 보태 서구적 연역 사고로 실증 과학을 정착시켜온 결과입니다. 동양은 추상적 상상으로만 대상을 바라봤기에 과학적 지식의 외연을 넓히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을 시리즈로 무려 27권이나 낸 조지프 니담은 15세기 이전까지 중국의 과학기술은 서양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양의 과학은 중세 과학 수준에 머물러 더 이상 발전을 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해 버렸습니다. 니담의 말처럼 세계 과학문명은 "대양과 같아서 온갖 문명으로부터 발현한 기술들이 샛강처럼 흘러들어 만들어진 결과"라고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해 정체된 근대 동양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전혀 기여를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동양은 이미 기원전 5~6세기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사상가들이 인간의 도덕률과 관계 문제를 고민해 왔습니다. 그중에서 공자는 바로 현대 과학이 밝혀내고 있는 자연법칙을 간파하고 '중용'을 설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동양은 서양보다 2천 년을 앞선 사유의 세계를 펼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관념과 사유에 머물러 실용화로 발전시키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인 것입니다.

자연과학은 밥을 먹여주지는 않습니다. 지구 밖으로 간다고 인간사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세상을 보는 견해가 달라지긴 합니다. 하지만 결국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기에 인문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지구를 이야기하고 우주를 사유해도 당장 배고프고 더워 땀나는 것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유와 실천의 경계를 어떻게 잘 융합해 나가느냐가 중요해지는 아침입니다. 구름에 가렸지만 태양빛의 온전한 에너지를 오늘은 얼마나 제 힘으로 사용할 것인지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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