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구성하고 모여 사는 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본질이다. 사회 규모가 확장될수록 많은 제도와 법들이 만들어져 사회가 원활히 굴러가도록 규제하고 권장하는 것이 또한 기본이다. 그 전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허용되는 자유에 대한 권리에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든 공산주의 국가든 '민주주의'를 국호로 내걸고 헌법에 보장함으로써 인류보편지향의 국가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 국가에서 만든 제도가 시대를 거치며 복사가 되어 다른 나라의 법과 제도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게 된다. 시간이 지나 사회 보편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살아남아 전승되고 발전된다. 호모사피엔스 인류의 장점이다. 좋은 것들은 계속 이어받아 인류 지성사의 발달차원을 넘어 당연히 받아들이고 누릴 수 있는 기본 전제로 삼는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아직도 영장류의 기저를 잠식하고 있는 신분제의 망령이다. 근대 인류에 오면서 무너져 내려 평등의 가치 속에 묻혔으니 그 세월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민족의 신분제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생존의 바닥을 지나오면서 해체되어 버렸다. 생존의 공간을 넘어왔기에 틀이 바뀌어 새판을 짤 기회를 잡았고 이 기회를 잘 발전시켜 지금의 번영을 이루는 발판으로 삼았다.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권리를 누리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이 당연한 평등의 원리가 어느 과녁에 맞혀져 있느냐가 논란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인권의 평등이냐 돈의 평등이냐에 따라 관점의 차이가 나고 접근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제가 다시 부활하고 있는 느낌이지만 가진 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톨레랑스를 요구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가치가 존중받는 쪽으로 진화되고 조정받고 있다.
시대가 상황을 만들고 상황이 주류를 만든다. 세상에 정답은 없지만 해법을 내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지만 논쟁을 지속할지언정 추구하는 근본은 결국 같다. 인류에게 보편타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조건이 없다면 어떠한 법과 논리와 제도도 의미가 없어진다. 폭력과 권력, 돈의 힘만이 우세한 아수라의 혼돈 세계가 되고 만다.
그런데 사회가 바르게 가도록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악용하여 소수 권력자의 이권을 차지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례들은 너무도 많이 보게 된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게 만들어진 법은 없지만, 그거라도 지켜야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앞으로 갈 수 있다는 전제가 담보조건이다. 이를 악용하려 드는 소수로 인하여 사회 전반이 피폐해지고 결국 망하고 만다.
이런 현상이 횡횡하는 현장이 정치판만은 아니다. 사회 여러 곳에서 독버섯처럼 자생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깨어있는 시민들이 지켜보고 언론이 지적해서 고쳐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주 국내 모 대학의 석좌교수 자리에 추천된 군 장성과 관련된 기사를 봤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해병대 상병 사망사건과 관련하여 언급된 책임자급 장군 중 한 명이다. 일단, 사건의 전모나 그가 교수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논외로 치자. 자격이 있으니 해당 조직에서 추천했을 것임은 믿어야 한다. 하지만 국내 대학들이 석좌교수 자리를 어떻게 오남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례로 읽히는 부분은 낯 뜨겁지 않을 수 없다.
석좌교수(碩座敎授 ; chair professor)는 "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이룬 당대의 석학을 초빙해 모시는 교수"를 말한다. 보통은 외부기관이나 개인 기탁금으로 조성된 기금이나 대학발전기금등의 재원으로 석좌교수를 지원하는데, 강의보다는 연구활동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명예로운 자리로 간주된다. 국내에서 이 석좌교수의 영예가 시작된 지 40여 년밖에 안되는데 그나마 학문적 업적이 뛰어난 교수보다는 고위공직자나 정치인, 공공기관 임원, 언론인 출신 석좌교수가 대부분이라는 게 문제다. 국내 대학들은 석좌교수 자리를 대학 브랜드 제고나 전관예우를 통한 로비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석좌교수제를 한번 비교해 보자.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Lucasian chair of Mathematics)라는 수학 관련 분야의 교수직이 있다. 이 직책은 1639년부터 1640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 의회 의원이었던 헨리 루커스에 의해 1663년 만들어졌다. 루커스는 책 4000권 상당의 도서관을 대학에 기증하고 그의 부동산의 이자에서 나오는 돈을 해마다 교수 기금으로 출연했다. 이 루카시안 출신으로 아이작 뉴턴, 찰스 베비지, 폴 디랙, 그리고 스티븐 호킹 박사 등이 있다.
국내 대학들이 석좌교수직을 변질되게 사용하는 사례가 많아서 그렇지, 좋은 사례들도 여럿 있다. 서울대에 개인재산을 기부하여 강의실을 신축하여 후학들이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지원하고 부친의 호를 따서 '우석 경제관'이라고 명명한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 같은 분도 계신다. 카이스트에는 500억이 넘는 자산을 기부하신 정문술 회장 같은 훌륭한 시업가도 계셨다. 개인 명의는 아니더라도 대기업들이 회사 이름으로 명명된 강의실 건물을 지어주어 후학들의 학업을 지원한 사례들도 많다. 서울대만 해 LG경영관, 대림국제관, 포스코스포츠센터, CJ인터내셔널센터, 롯데국제교육관 등등이 있고 카이스트에도 김병호 김삼열 IT융합빌딩이 있다.
석좌교수직은 아니더라도 'ㅇㅇ 장학회'형식으로 개인 재산을 출연하여 교수들의 연구와 학생들의 학업을 지원하는 사례도 대학 캠퍼스 곳곳에 배어 있다. 우리 사회의 지성을 지탱해 온 저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석좌교수제 운영이 국내에서는 파행으로 가고 그저 홍보역할을 하는 인물들을 모시는 자리로 전락해가고 있음은 눈여겨봐야 한다. 대학 캠퍼스가 학문의 연구가 아니고 취업을 하고 밥벌이를 하는 경제 현장의 한 곳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석좌교수라는 자리에 대한 컨센서스가 한국 대학에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고 그저 가져다 쓴 용어에 불구하지만 용어에 걸맞은 인물과 연구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대학 사회가 만들어가야 하는 사명이다. 이름에 걸맞지 않으면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제도도 속되게 만들뿐더러 그 자리에 앉은 사람도 초라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