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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한계, 인식의 한계

by Lohengrin

현재 우리 사회가 굴러가는 현상을 바라볼 때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보다는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더 지배적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K 컬처, K 푸드, K 아이돌 등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월등한 주목을 받고 있고, 전쟁의 폐허에서 선진국 대열에 발 들이민 유일한 나라라는 자부심의 샴페인이 너무 일찍 김이 빠진 것은 아닌지 하는 느낌이 강하다. 기상천외한 비상계엄을 만나고 그 여파로 극단의 양쪽으로 갈라서 내전을 방불케 하는 모략과 선전 선동이 난무한다.


사회 전반을 너무 단편적으로 보는 시각일 수 있다.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 다양한 분야로 나눠 세부적으로 다시 평가하는 것이 맞겠지만 일단 전반적인 추세만을 놓고 보면 그렇다.


왜 이 모양 이 꼴인 다소 비참하고 처량한 모습으로 현재의 우리를 바라보게 되는가?


'시대적 한계'라는 시각으로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까?


한계(限界 ; limitations)는 "힘이나 책임, 능력 따위가 다다를 수 있는 범위"를 말한다.


사회 현상을 이 '시대적 한계'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위로를 해주고 싶은 동정심도 든다.


"그래 딱 거기까지야. 너의 능력의 한계이고 너의 생각의 한계이니 어쩌겠어.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거지"라는 위안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 한계를 넘어설 때 새로운 변혁을 이루어내고 발전해 왔다. 발상의 전환이다. 기존의 틀을 깨야 그 한계를 넘어갈 수 있다. 한계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이지만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새로운 경이의 세상이 펼쳐진다.

분야에 따라 이 한계의 경계를 넘어선 사례들이 인류의 문화와 지성과 생존을 바꾸어 놓았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을 통해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시선이 확대되었다. 1925년 양자역학이 등장함으로써 고전역학의 개념을 뛰어넘는 신기원이 펼쳐져 현재의 과학기술문명을 만들었다. 거시세계의 움직임을 해석하는 고전역학의 천재였던 아인슈타인조차도 죽을 때까지 미시세계의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못했다.


'시대적 한계'로 아인슈타인을 보면 이해할 수도 있다.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완전하게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했을 정도로 양자역학은 인간의 직관으로는 해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해석되지는 않지만 존재하고 증명되고 결괏값이 나오는 현상, 그것이 직관의 한계를 넘어선 세상에 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의 '시대적 한계'로 인하여 못 보고 안 보일 뿐이다.


엄밀한 과학이라는 분야에서조차 이 '시대적 한계'는 여실히 드러나는데, 비가시적인 사회 현상에서 드러나는 '시대적 한계'의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사회에서의 '시대적 한계'는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넘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로 말이다. 인간의 단점 중 하나가 '반드시 스스로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을 반면교사 삼을 수 있으나 옆에서 지켜보면 자기 것이 아니기에 무덤덤해진다. 자기가 스스로 피 터지게 헤치고 나가봐야 그때서야 '그래서 그랬구나'를 알게 된다.


'시대적 한계'를 구성하고 이 한계가 반복되는 이유다.


한국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발목 잡힌 이유 중 하나가 이 '시대적 한계'의 경계에 와 있기 때문인 듯하다.

'시대적 한계'는 사회 구성원의 '인식의 한계'일 가능성이 100%다. 다수 국민들의 수준에 맞는 대통령이 뽑히는 게 당연하다. 나중에 손가락을 자를지언정 말이다. 다수의 횡포에 끌려가는 게 대의 민주주의의 모순이긴 하지만 이 또한 다수가 합의한 정치체계의 방편이다. 이 범위 안에서 움직이고 운영되는 것을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사회적 현상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아니라고 발뺌을 해도 소용없다. 더럽고 치사하더라도 당분간 이 공기를 같이 마시자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시대적 한계'다.


하지만 한계는 뛰어넘으라고 설정한 것일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하면 못 넘을 것도 아님을 눈치챌 수 있다. 시대적 인식이 낙후되고 노후되어 있다면 과감히 바꾸기를 시도하면 된다. 케케묵은 이념을 끌고 오고 구시대적 용어를 끌어들여, 자기들만의 신세계를 획책하려는 무모함을 경계하면 된다. 사회가 굴러갈 방향은 자명하다. 보편성을 추구해야지 특수성을 지향해서는 곤란하다.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다수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시대적 한계가 늪이라는 사실에 대한 공통인식이 있어야, 다음 시대를 더 밝게 만들고 받아들일 수 있고 현재를 개선할 수 있다. 암울한 시대 속에서 계속 살기엔 밖의 햇살이 너무도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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