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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l 07. 2020

산다는 것은 기억을 꺼내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자아를 찾기 위한 인간의 술래잡기는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과도 맞닿아 있을 겁니다. 천인천색의 접근법을 통해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했음에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깨달은 사람'은 과연 있는 것인가? 성자로 꼽을 수 있는 부처나 예수 정도? 하지만 깨달았다고 하는 것조차 타인에게 확인시킬 방법이 없으니 그 또한 알 수 없는 오묘한 부조화가 숨어 있습니다. 그렇다니 그렇게 믿고 있을 뿐입니다.


자연은 철저히 독립적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신하고 간접 경험한다는 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바로 인간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불립문자. 

익히 동양에서는 언어로 세상 만물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 함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기능성 자기 공명 장치로 브레인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며 뉴런의 움직임을 추적해 인간의 존재 자체를 '기억'이라는 화학적 파동으로 분석해 가고는 있지만 아직도 근본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가장 인간 존재의 규명에 다가선 것이 바로 '기억의 집합체'로 인간 개인 존재의 단위를 보는 시각입니다. 기억이 어떻게 브레인에 쌓여 연쇄 작용을 일으키고 과거의 일들을 현재와 조합해 재해석해내는 과정에서 일관성을 유지해 내는지는 아직 미지의 세계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현재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은 3개월 전 내 몸을 구성했던 세포가 아닙니다. 계속 재생되어 3개월 전 세포는 현재 이 시간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각질로 사라지고 손톱 끝으로 사라집니다. 어찌 과거의 내가 나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그나마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라는 연관성의 확인은 기억이라는 정점을 간직하고 있기에 같은 존재일 거라고 믿을 뿐입니다. 결국 존재는 '기억'으로 비로써 가능했던 것입니다.


아침에 무거운 화두를 쥐고 있은 것 같지만 이 무거운 화두의 단초는 어제 오후 퇴근길 전철 안에서 우연히 퇴임하신 회사 선배님을 만나 과거의 기억들이 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에서 잊힌 듯 전혀 등장하지 않던 옛 사건들이 그 선배님과의 만남을 통해 불현듯 영사기 돌듯 떠오릅니다. 같이 회사 생활한 지 25년도 넘은 시간이 지나왔으면 뉴런의 재생이 수백 번은 바뀌었을 텐데 아직도 과거를 저장하고 있는 뉴런의 놀라운 재생력에 놀라게 됩니다. 두개골에 갇히고 뇌척수액에 떠서 고립되어 있는 암흑의 감옥과 같은 브레인의 제한된 공간속에서 그 많은 과거 정보를 어떻게 재생하고 가져올 수 있는지 호기심을 더욱 자극합니다.

'기억의 재생'은 공통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관계 맺기의 단초를 중시하는 한국 문화의 터전에서, 같이 형성된 과거의 기억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응원군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작용합니다. 그렇게 계속 '기억'을 되살리고 존재의 달력에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보수하고 관리하며 사는 것인가 봅니다. 추억을 먹고 살 날들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는가 봅니다. 나이 든다는 것, 뒤를 돌아본다는 것, 추억을 이야기한다는 것, 산다는 것은 바로 과거를 현재로 끌어들여 위안의 그루터기를 만드는 일입니다.


가끔 나무 그늘에 앉아서 땀도 식히고 시원한 생맥주 한 잔에 헛헛한 웃음을 던질 일이면 족하지 않을까 합니다. 장마전선의 북상으로 날씨도 찌뿌둥한데 막걸리 한 사발에 고추장 찍어 먹는 말라비틀어진 멸치가 더 어울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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