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Jul 08. 2020

아이만 보이고 나는 안 보이는 시간

어제저녁 올 2월에 군에 간 막내 녀석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요즘 군대는 저녁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게 해서 매일  문자도 보내곤 합니다. 꼰대들이 경험했던 군생활이 아니라 병영 캠프에 들어간 듯합니다만 세월 참 좋아졌다고 해야 할까요? 군대가 좋아졌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좋아진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입대하고 첫 휴가를 19일에 나온답니다.


2월 25일 훈련소에 들어갔으니 만 5개월 만에 처음으로 사회로 나오는 휴가입니다. 훈련소 입소할 때가 코로나 19 전염률이 가장 높을 때여서 입소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차 안에서 송별인사를 하고 들여보냈는데 자대 배치를 받고도 계속 면회도 안돼서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휴가를 받아 얼굴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참 "시간은 유수와 같다"는 뜻이 떠오릅니다. 막내 놈 입대하고 입영생활은 잘할지 걱정하던 시간이 벌써 5개월을 넘겼으니 말입니다. 사실 아이들 크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바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의미할 텐데 아이들 크는 모습은 보이는데 제가 늙는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네요. 참 아이러니하죠. 애들 큰만큼, 시간은 저를 지나갔을 텐데  말입니다.


컵의 물 한잔을 마시고 '반이나 남았네'라는 것과 '반이나 없어졌네'라고 하는 시각의 차이를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어떤 시각을 갖고 출발할까요? 아직 반이나 남았다는 시각이 좋을까요, 반이나 없어졌네라는 시각을 견지하는 게 좋을까요? 두 관점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아있다는 시각이 긍정의 시각일 수 있으나 이 또한 함정이 있습니다. 그만큼 남아 있으니 천천히 해도 되겠다는 잠재의식이 싹틀 수 도 있습니다. 물론 부정적 시각이라는 반이나 없어졌다는 관점도 반이나 없어졌기에 남은 시간만큼은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승화될 수 도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에는 정답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우주만물의 공존의 원리 외에 인간의 시각이 가미되는 생각과 논점은 바로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도 더 좋고 나쁨을 논하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눈높이만이 최고의 선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매일 오늘이라는 날을 맞이 합니다. 그것에 1일이니 2일이나 숫자를 부여하는 것은 사회가 공유하는 약속일뿐입니다. 개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의미 없는 숫자입니다. 그저 해가 지면 밤이고 해가 뜨면 낮입니다. 이것 이상 중요한 것도 낮은 것도 없습니다. 곧 이 순간 이 시간이 가장 중요함을 깨닫게 되면 그 어떤 감언이설로 세상을 해석해봐야 무의미함을 알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이 순간, 지금 나는 어떤 해석을 세상에 들이대고 있을까요?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어떤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이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도 빛이 나고 가슴 떨리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해석을 하고 있을까요? 그 해석의 방편이 무엇일까 자판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봅니다.


침잠, 깨어있음, 들여다봄, 사랑, 화두, 음악, 글쓰기 등등 --- 참 어려운 해석의 선택이지만 그래도 세상을 온전하게 긍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사랑만이 모든 것의 해석을 가능케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은 우주 세상 만물의 해석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으나 형이상학적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단어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정의를 붙여 그 의미를 만인이 공유한다"는 언어의 추상적 개념은 무한의 세계를 연 열쇠였습니다. 사물을 지칭하는 차원을 넘어 추상의 세계를 끌어들여 공간 차원을 확장시킨 것입니다. '사랑'은 그 대표적인 추상명사인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 것, 또한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고 믿는 것, 바로 종교로 연결되는 키워드였던 것입니다. 인간 세상을 보는 열쇠는 결국 '사랑'이 아닌가 합니다.


아이들의 커감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추억하는데 큰 이정표가 될 겁니다. 자식에 대한 걱정, 사랑 그런 것들이 교차하는 아침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과감히 결단하고 실행하는 것을 보고 나름 대견한 마음이 우선합니다. 젊음에 시간은 중요한 변수가 아닙니다. 그저 긍정의 마인드로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고 실행하며 자기 삶을 살면 될 뿐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성장하고 마음가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산다는 것은 기억을 꺼내는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