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을 누구는 '초록'으로, 누구는 '푸르게' 볼까?

by Lohengrin

5월의 찬란한 자연 속에서 우리는 무심코 "연초록이 짙어간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어느덧 신록은 짙푸른 숲으로 바뀌고, 우리는 “푸르름이 더해진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푸르름, 과연 녹색일까 파란색일까? 색은 보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종종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연결된다.


우리가 색을 보는 능력은 단순한 개인차를 넘어서 ‘생물학적 다양성’에서 기인한다. 인간의 망막에는 약 600만 개의 원추세포가 있고, 이 세포들은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을 감지하는 L(긴 파장), M(중간 파장), S(짧은 파장)로 구분된다. 이 세포들은 각각 노란-빨강, 초록-파랑, 파랑-보라 계열의 색을 감지하며, 이들의 조합으로 우리는 수백만 가지 색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섬세하게 색의 농담을 구분하고, 또 누군가는 붉은색과 녹색을 동일하게 인식한다. 그 유명한 ‘드레스 논쟁’—흰색과 금색 혹은 파랑과 검정—은 이 시각 차이가 얼마나 명확하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준다.

75.25%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색으로 보았다. 이 단순한 사건은 “무엇이 정상인가?”를 묻기보다, “우리는 각기 다른 색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명확한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문제는 ‘보는 것’만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에도 있다. 한글처럼 수많은 형용사를 품고 있는 언어에서는 빨간색 하나를 표현하는 단어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새빨간', '핏빛', '발그레한', '불그죽죽한'… 심지어는 ‘사랑에 빠진 얼굴색’이라는 시적 표현까지 가능하다. 이처럼 감성적이고 미묘한 표현이 언어적 풍요로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커뮤니케이션의 오해를 부를 수도 있다. ‘옅은 살색’이라는 표현 하나가 인종차별적 함의를 가진 단어로 지적되며 사라졌던 것도, 언어가 색을 정의하고 그 정의가 사회적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단지 색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색의 언어를 정리하고자 등장한 것이 바로 ‘팬톤(Pantone)’이다. 팬톤은 RGB(빛의 삼원색), CMYK(잉크의 삼원색)와는 달리, 색의 고유번호를 부여해 정확히 지정할 수 있도록 한 색상표준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PANTONE 186 C’라고 하면 세계 어느 디자이너에게나 동일한 강도와 농도의 붉은색을 말할 수 있다. 이는 지역, 장비, 종이 종류와 상관없이 일관된 색을 재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결정적 도구다. RGB나 CMYK로는 완전히 재현되지 않는 색상을 팬톤은 고유의 잉크 배합으로 재현한다. 팬톤의 등장은 단지 기술적 혁신이 아니라, 색에 대한 ‘정의의 표준화’를 시도한 인류의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정리하고자 했던 또 하나의 ‘언어’이며, 철학이기도 하다.


색을 보는 눈은 단순히 시각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생각의 틀’을 형성하는 기본단위이기도 하다.
누군가 초록이라 부르는 것을 누군가는 파랑이라 말할 때, 그것은 단순한 인식의 차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거기엔 경험, 기억, 언어, 문화의 층위가 복합적으로 개입한다. 어린 시절 푸른 하늘을 그리며 파란색 크레파스를 꺼냈던 기억과, 봄날 새싹을 보며 연두색으로 색칠하던 순간이 쌓여 지금의 ‘색 감각’을 만든다. 즉, 색은 감각과 문화, 기억이 결합된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색의 정의는 단지 시각적 기준으로만 정리될 수 없다.


우리는 자주 '색깔이 다르다'는 말로 갈등이나 차이를 표현한다. 정치적 입장, 취향, 신념… 이 모든 것을 '색'으로 치환한다. 그리고 색이 다르면 함께할 수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생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한 색 인식이 존재하듯, 서로 다른 색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양성을 뜻하는 것이지 갈등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색을 ‘정확히 정의하고 공유하는 것’은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나누기 위한 전제다. 색의 이름을 모르거나 색을 어떻게 표현할지 혼동될 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색의 감성적 정의와 과학적 정의는 공존해야 한다. 팬톤과 같은 기술적 정의는 표준을 제공하고, 언어와 감성은 다양성과 상상력을 더한다.


나는 지금 5월의 숲을 바라보며 ‘푸른색’이 아니라 ‘초록’이라 말한다. 어떤 이가 파랗다 말해도 나는 여전히 초록이라고 느낀다. 이 차이는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을 정의하고, 나누는 것이야말로 색을 다룬다는 일의 본질이다. 색을 정의한다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색을 공유한다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언어다. 그렇기에 색은 단지 빛의 굴절이나 세포의 반응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규정짓는 가장 깊은 언어 중 하나다. 그리고 지금, 나는 푸르지 않은 초록의 5월을 살고 있다. 그 색은 내 눈으로 보고, 내 기억으로 감각한 세계다. 그 누구의 팬톤 넘버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지만, 내게는 완벽하게 ‘정의된 색’이다. 그것이 바로 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초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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