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것을 새롭게 보는 법

by Lohengrin

요즘처럼 변화의 속도가 빠른 시대엔 ‘먼저 시작한 자’가 반드시 승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 발 늦게 출발한 자가 다른 길로, 더 빠른 방법으로 앞서 나가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경제·경영 분야에서는 이를 ‘립프로깅(leapfrogging)’라고 부른다. 기존 단계를 밟지 않고, 한두 단계를 건너뛰어 기술과 시장에서 선두에 올라서는 현상이다.


한때는 기술력이 곧 국력이고 선진국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스마트폰 기반의 모바일 결제 시스템을 중국이 먼저 완성했고, 인도는 디지털 생체인증 ID 시스템으로 국민 전체를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모두가 신용카드를 만들고 있을 때, 그들은 카드 없이도 살아가는 사회를 먼저 실현해 버렸다.


이런 현상은 인프라의 부족, 즉 ‘결핍’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 결핍은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허용한다. 유선전화가 없으니 스마트폰으로 바로 넘어가고, 전통 금융망이 약하니 QR코드 결제 생태계로 직행한다. 누군가에겐 ‘부족함’이지만, 다른 이들에겐 ‘기회’인 셈이다.


립프로깅이 단순한 추격에서 끝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라는 무기를 들고 나오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하버드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가 제시한 이론으로, 값싸고 단순한 기술이 시장 하단에서 시작해 점점 메인 시장을 삼켜가는 구조다. 1970년대 미국 자동차 시장을 떠올려보자. 당시 일본의 도요타, 혼다 등은 크고 웅장한 미국차에 비해 초라해 보였지만, 연비는 좋고 가격은 저렴했다. 오일쇼크와 함께 연비 효율이 중요해지면서 소비자는 새로운 선택을 했다. 결과는? 일본 자동차의 급부상이었다. 오늘날도 이 공식은 유효하다. 성능은 비슷하거나 낫고, 가격은 저렴한 기술이 시장의 판을 바꾸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요제프 슘페터는 말한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혁신은 기존 것들의 새로운 결합(new combination)에서 온다.” 이 말은 오늘날의 ‘창조적 모방’과도 맞닿아 있다.

스마트폰은 ‘전화기 + 카메라 + MP3 + 브라우저’의 조합이다. 전자책 리더기는 ‘디스플레이 기술 + 저장장치 + 유통 플랫폼’의 결합이다. 이미 있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엮어내는 능력이 진짜 혁신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조합의 기회를 가장 잘 포착하는 쪽이 ‘후발자’다. 선발자는 기존 방식에 익숙해져 있어 변화에 둔감하지만, 후발자는 오히려 필요에 의해 더 과감하게 결합하고 실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 생태계의 변화 속도가 빨라진 지금, 리프로그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흐름이다. AI, 바이오, 모빌리티, 에너지 등 어떤 분야에서도 이제는 "먼저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는 우위가 보장되지 않는다. AI 모델도 마찬가지다. GPT나 미드저니 같은 선두주자들이 존재하지만, 오픈소스 생태계에서는 후발 스타트업들이 기존 모델을 벤치마킹하고, 특정 기능이나 언어 특화 버전으로 더 빠르게 시장에 진입한다. 이미 '창조적 모방 + 맞춤형 조합'이 정답이 된 시대다.


립프로깅은 결국 ‘결핍의 역설’이다. 없는 것을 아예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다 보니, 기존 시스템의 굴레를 벗어난다. 이때, 진짜 혁신은 탄생한다. 그들은 물리적 기반시설 없이도 디지털 신분증, 모바일 금융, 온디맨드 서비스를 구축했다. 개발도상국이 디지털 선진국을 뛰어넘는 건 더 이상 이변이 아니다.


립프로깅의 본질은 단순한 추월이 아니다. ‘같은 것을 새롭게 보는 법’, 즉 다른 방식의 연결과 조합에 있다. 선발자가 놓친 틈새, 기존 질서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경험을 읽고, 거기서 새로운 시장을 열어가는 것이 리프로그다. 기술의 시대, 창조의 시대, 모방의 시대. 이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묶을 것인가’다. 립프로깅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연결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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