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인가 – 먹고 자고 싸는 존재에 대한 사유

by Lohengrin

오늘 새벽 3시 반에 오른쪽 다리 종아리에 쥐가 나서 잠이 깼다. 심한 통증에 일어나 다리를 펴기 힘들 정도였다. 간신히 벽을 기대어 다리를 펴서 종아리 근육을 늘려준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어제 강원도 평창의 휘닉스 컨트리클럽에 지인들과 골프를 치느라 조금 걷기는 했지만 그 강도가 심하지는 않았다. 어제 걸은 걸음걸이를 체크해 보니 11,865 걸음 정도밖에 안 된다. 이 정도는 평소 1시간 정도 조깅하는 수준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간밤에 종아리 근육이 뭉쳐 쥐가 났다는 것은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것일 테다. 종아리 근육이 통증이 남아있어 오늘 아침 조깅은 포기하고 흰 화면과 마주하고 이 생물학적 현상에 대해 들여다본다.


우리는 살면서 너무나 당연한 것을 잊고 살아간다. 마치 숨을 쉬면서도 공기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듯, 생존에 필수적인 조건들을 무시한 채 살아간다. 인간은 고등한 정신과 문명을 창조한 존재라 자부하지만, 실은 그 누구보다 철저히 ‘생물학적 존재’라는 사실 앞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고도로 진보된 사회 속에 살고 있든, 얼마나 고차원적인 철학을 논하고 있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근본이다.


인간은 먹고 자고 싸는 존재다. 이 단순한 사실은 너무나 일상적이기에 오히려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우리는 공부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삶의 고귀한 의미들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정작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생물학적 기반, 즉 먹고 자고 싸는 행위의 중요성은 망각한다. 그러나 이 셋 중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곧장 무너진다. 잠을 설친 날 아침의 무기력함, 며칠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을 때의 집중력 저하, 배설의 문제로 병원에 가야 했던 경험들. 이 모든 것이 생물학적 조건이 얼마나 생존에 직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생존 조건의 본질은 인간이 비범한 기술을 동원해 만든 극한 환경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유인 우주선이라는 과학기술의 결정체 속에서도, 생리적 문제의 해결은 최우선 과제가 된다. 아무리 궤도 진입에 성공하고, 달 표면에 착륙하더라도, 그 안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가'의 문제는 결국 먹고 자고 싸는 일의 유지에 달려 있다. 우주선 안의 식량 보존 기술, 수면 공간의 중력 보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설물의 처리 시스템은 인간 생존의 핵심이다. 만약 우주 화장실 변기가 고장 난다면? 그저 몇 시간 참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곧 생존의 위협이 된다.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는 오줌마저도 정수하고 재사용한다. 단지 물이 귀해서만은 아니다. 한정된 공간과 자원 안에서 생물학적 시스템을 유지하려면, 인간이 배출하는 모든 것을 다시 생존 자원으로 순환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생물학적 순환 구조의 모사이며, 결국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기술적 고민이다.


인간이란, 결국 폐쇄 생태계 속에서 생리적 균형을 유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지구 위 일상에서는 자주 잊는다. 물이 나오고, 음식이 주어지고, 잠잘 공간이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게 될 수 있는 순간의 두려움을 잊고 지낸다. 이 당연한 것들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정신적인 고상함도, 철학적 깊이도 논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사상과 이념은 생존 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으면, 사유할 수 없다.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에 대한 무시 또는 경시는 때때로 정치와 사회의 몰락을 불러온다. 역사 속에서 '백성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통치는 결코 지속되지 못했다. 고대 중국의 명군이라 불리는 요순시대의 지도자는 '백성들이 근심 걱정 없이 농사짓고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한 지도자였고, 조선의 성군 세종은 농사의 기후를 예측하기 위해 천문대를 만들고, 한글을 창제하여 의약서와 농서를 보급했다. 모두 백성의 먹고사는 생물학적 삶을 지키기 위한 행동들이었다.

이렇듯 '먹고 자고 싸는' 일은 철학보다 앞선다. 생물학적 기반 위에야 문화가 있고, 신념이 있고, 제도가 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리더십은 반드시 파국을 맞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AI 기술이 발전하고, 메타버스와 같은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열리고 있지만, 정작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 조건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정교한 가상현실도, 굶주린 배를 대신 채워주지 못한다. 초고속 인터넷이 있어도 위생이 확보되지 않으면 전염병 하나에 사회는 쉽게 붕괴될 수 있다.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고차원적 존재이기 전에, 생물학적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생명의 정교한 시스템 안에 거주하는 하나의 유기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심장이 박동하고, 폐가 공기를 마시며, 위장이 소화하는 이 기적 같은 과정들이 멈추는 순간, 우리의 철학도, 사랑도, 문명도 존재 의미를 잃는다.

철학은 생존 위에 쌓인다. 윤리는 먹는 것 위에 서 있다. 종교는 자는 존재의 평안에서 출발한다. 인간 존재의 위대함은 고상한 언어가 아니라, 기본적인 생존 조건을 얼마나 잘 유지하고 존중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금 질문해야 한다.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공기의 가치는 무엇인가? 오늘 내가 먹는 밥 한 끼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 하루 평온히 잠들 수 있음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단지 의식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매 순간 우주만큼 복잡한 생명 기계가 조용히 그러나 정교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기적이다. 이 기적을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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