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보다 더 나은 삶과 지혜를 위해 나는 어제 무엇을 하였고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전 세계 어느 공동체든 신화를 가지고 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여하여 단합을 하는 중요한 단서이자 시작점이다. 신화는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이야기이다. 단순한 옛이야기를 넘어, 신화는 인간의 존재 이유와 세계의 기원을 묻는 질문에 대한 상징적 답변이며, 공동체의 정체성과 가치관의 원형을 제공한다.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시원을 설명하고, 그리스로마 신화는 서양문명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며, 북유럽 신화는 한겨울 눈 덮인 대지에서 솟아오른 가장 거대한 상상력의 결정체로 현대 대중문화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신화의 중심에는 신들의 왕 오딘이 있다.
오딘은 단순한 신이 아니다. 그는 힘보다는 지혜를 추구하는 자이다. 그는 전지전능한 신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다 알지 못한 어떤 진리와 비밀을 찾아 계속 나아가는 존재다. 우리가 흔히 신이라 하면 전능함을 먼저 떠올리지만, 오딘은 그 전능함조차 내려놓고 지혜를 구하기 위해 대가를 치른다. 그는 지혜의 샘을 지키는 미미르에게 한쪽 눈을 바치는 결정을 한다. 그 샘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진실과 인식, 세계의 질서를 담고 있는 지식의 근원이었다. 신조차 자신을 훼손해야 접근 가능한 진리의 세계. 오딘은 그것을 알았고 실천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딘은 룬 문자, 즉 세상의 본질을 구성하는 기호의 체계를 얻기 위해 위그드라실에 9일간 목을 매달린다. 그는 궁니르 창에 찔린 채, 음식도 없이 버틴다. 이는 신의 고통이라는 상징 너머, 인간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존재의 무게를 대변한다. 오딘은 룬 문자를 손에 넣은 뒤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야 참으로 지혜로워졌도다.” 이는 단순한 문자 해득이 아니라, ‘이해’의 완성을 의미한다. 문자는 기호이며, 기호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결국 문자란, 세상의 숨은 구조와 감춰진 진리를 인간이 다룰 수 있도록 번역한 일종의 주문이자 도구이다. 오딘은 이를 통해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비로소 진정한 지혜의 길에 들어섰다.
신화는 여기서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떤 대가를 치르고 지혜를 얻고 있는가? 하루하루 살아가며, 우리는 어떤 지적 갈증과 실천을 가지고 있는가? 지혜란 읽은 책의 수나 습득한 정보의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의 깊이, 삶을 대하는 태도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오딘처럼 우리는 우리 나름의 '눈'을 바치고 있는가? 우리는 정신의 고통을 감내하며 나아가는 자기희생의 여정을 실천하고 있는가?
현대 사회는 손쉽고 빠른 정보를 공급받는 데에는 탁월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생각으로 숙성시키는 데에는 게을러진 시대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진짜 앎에 다다르지 못한 채 머무른다. AI와 알고리즘이 대신 생각해 주는 시대, 우리는 얼마나 깊이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가? 오딘이 한쪽 눈을 대가로 지혜를 얻었듯, 우리도 ‘시간’과 ‘고통’이라는 희생을 바치고 있는가? 우리가 얻는 정보는 어떤 통찰로 변모되고 있으며, 어떤 세계를 다시 구성해내고 있는가?
지혜는 관성에 저항하는 데서 시작된다. 매일 아침, 우리는 어제의 나를 넘어서야 한다. 더 많은 책을 읽기보다 한 줄의 문장을 깊이 이해하고, 더 많은 뉴스를 읽기보다 하나의 사건을 여러 관점에서 해석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렇게 우리는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오딘처럼, 진리를 향해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끝내 "나는 이제야 참으로 지혜로워졌도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을 위해, 오늘 우리는 어떤 눈을 바칠 수 있을까?
그 첫걸음은 아마도, 신화 속 오딘처럼 자신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나는 어제 무엇을 했고, 오늘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내일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더 깊이 있고 따뜻하며 지혜로운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나를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신화적 여정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