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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l 14. 2020

계속해야 할 '결정적 지식' 찾기

지난 일요일,  5월부터 개강한 '137억 년 우주의 진화' 8강 마지막 강의를 들었습니다. 3개월을 이어져온 지식 공부가 벌써 종강을 했습니다. 대학원도 6월 말에 종강을 했으니 소위 공부라고 하는 것에 방학의 시간이 왔습니다. 대학원 수업이야 월, 수요일 저녁시간에 진행되니 바쁘기는 하지만 수업에 참여하는데 큰 무리는 없습니다만 일요일마다 하는 '137억 년 우주의 진화'공부는 정말 시간을 내고 찾아가야 하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 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장하는데 강의를 진행해도 되나 걱정 반 근심반으로 참여했는데 공부의 열정에 코로나 19가 감히 접근을 못했는지 안전하고 무사하게 강의 진행을 잘 마쳤습니다.


'137억 년 우주의 진화'강의에 참여하게 된 세월이 벌써 8년을 넘기고 있으니 대학원 수업보다도 오래 듣고 공부를 한 셈입니다. 강의시간으로 따져도 일요일마다 기본 4시간이지만 5시간씩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3학점짜리 한 과목을 듣는 시간과 비슷하게 투자를 해야 했습니다. 매주 일요일 오후 시간을 오롯이 공부에 정진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하루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면 제일 먼저 꼽을만합니다. 뜨거운 여름을 쉬고 찬바람 부는 9월에 다시 '특별한 뇌과학'으로 마주할 예정입니다.


지난 8주 동안은 발생학, 호흡, 콩팥, 허파, 면역학, 바이러스, 박테리아 등을 들여다봤습니다. 특히 이번 학기의 결정적 지식으로는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는 바이러스를 분자식 레벨에서 들여다봤습니다. 면역학 전문가들이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을 굳이 일반인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알면 보입니다.

개인별 관심사가 다르기에 천차만별의 관점과 시선이 존재합니다. 어떤 것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잣대를 들이댈 수 없습니다. 다양성의 근본 위에 자아가 누구이고 무엇인가를 근본까지 들어가 본다는 것은 공부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지식에는 깊이의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지식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알아야 보이고 보여야 느낄 수 있고 느껴야 깨닫게 됩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여줘도 보지 못합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무지의 자각'.


지식에는 '결정적 지식'이 있습니다. 그 '결정적 지식'을 찾는 지난한 작업을 꽃피던 봄에 시작하여 한여름의 초입까지 계속했던 것입니다. 봄가을로 찾아 나선 '결정적 지식' 탐구의 길을 나선 지 어언 8년이나 되었습니다만 강의실을 나서면 머릿속 하얗게 새롭게 세팅되는 희한한 광경을 매번 목격합니다. 그래도 매년 강의실을 찾아옵니다. 결정적 지식을 외우려 하지 않고 겉핥기식으로 왔다 갔다 했기 때문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궁금하긴 한데 결정적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한 게으름이 우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위를 받는 것도 아닌데 매년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 담배와 술에 중독된다더니 '결정적 지식 찾기'에 중독된 것은 아닌지 살짝 걱정해봅니다.


단순히 겉만 핥아 접하고 내 지식인양 포장을 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잘난 체 하는 의기양양의 못남을 넘어서기 위해, 심연의 뿌리까지 들어가 봐야 합니다. 얕은 지식은 서너 번의 대화 속에 드러나게 됩니다. 깊이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입니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심연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 인문학이라면 자연과학은 끝이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증거와 증명을 통한 확실한 결말이 있어야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를 들여다보고 지구와 암석을 파헤쳐 봅니다. 그리고 인간의 브레인까지 들어와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 헤아려 봅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로 태어나 어떤 존재인지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은 삶을 사는 방법에 있어 천지차이일 겁니다. 계속 공부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지식이 떠가는 구름처럼 사라지지 않도록 꾹꾹 다지고 다져 확고한 틀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토대가 닦이면 확장성은 점증할 겁니다. 언어의 틀을 벗어난 관점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을 겁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깨달음이 아닐지라도 궁극의 도는 같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정적 지식'을 찾아 나선 올해 지난 8주 동안 고생했지만 잘 이겨내고 따라와 준 것에 대해 스스로 대견해해 봅니다. 더운 한여름 잘 이겨내고 선선한 바람 부는 가을에는 '특별한 뇌과학'으로 다시 도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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