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날씨, 그 필연적인 동행

by Lohengrin

여행은 자유와 낭만의 상징이지만, 그 자유로움 속에서도 우리의 발걸음을 조율하는 보이지 않는 변수가 있다. 바로 ‘날씨’다.


여행과 날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분위기와 가능성은 하늘이 만든다. 비가 오는지, 해가 뜨는지, 바람이 부는지에 따라 우리는 다른 표정을 짓고,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래서 언제 떠날지, 어디로 갈지를 결정할 때 가장 먼저 살펴보는 것이 날씨다. 목적지가 아무리 아름답고 가고 싶은 곳이라 하더라도, 우중충한 하늘이나 강풍, 폭설이 함께한다면 그 설렘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여행의 계획이란 언제나 현실적인 제약과 타협 속에 이루어진다. 반년 전부터 항공권을 예약하고 숙소를 정한 여행이 하루 이틀 전 일기예보 하나로 포기하기에는 준비한 시간이 너무 아깝다. 아니 온 가족이 휴가일정을 맞췄기에 날씨에 상관없이 강행하게 된다.


그래서 여행을 눈앞에 두었을 때 우리는 기상 앱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며 마음을 조율한다. 구름이 많은 날은 실내 위주로, 해가 쨍쨍한 날은 걷고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 바람이 강한 날은 계획을 늦추거나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날로 바꾼다. 그렇게 여행은 예상과 변수가 뒤섞여 만들어지는 유기적인 시간이 된다.


나는 지금 제주도에 와 있다. 지난 일요일부터 가족과 함께한 여행이다. 숙소는 산방산이 바로 건너다 보이는 '가족의 시간'이라는 이름의 펜션. 숙소 이름처럼 우리 가족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을 선물해주고 있다.

제주도로 내려오기 전, 일기예보는 마치 경고장처럼 느껴졌다. 일주일 내내 비가 올 것이라는 말에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우산을 챙겨야 할지, 신발은 어떤 걸 신을지, 실내 여행지를 미리 정리해두어야 하나 고민이 깊어졌다. 하지만 막상 제주에 도착한 순간, 하늘은 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듯 맑고 청명했다. 바람은 시원했고 구름은 하늘 장식처럼 떠 있었으며, 그 아래 제주 바다는 제 색을 뽐내고 있었다.


‘날씨는 결국 살아있는 자연의 언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아무리 기술을 발전시켜도, 하늘이 주는 하루하루의 표정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하다. 제주도에 도착한 첫 이틀 동안은 그렇게 운이 좋게도 완벽에 가까운 날씨 속에서 여행을 즐겼다. 태풍의 눈 속에라도 들어간 듯 고요한 날씨였다. 그러나 오늘 아침, 창밖으로 보이는 산방산은 회색 구름에 덮여 그 형체의 절반도 보이지 않는다. 밤새 내린 이슬로 정원 잔디는 촉촉하게 젖어 있고, 하늘은 온통 무채색의 수채화 같다.


오늘 하루의 날씨는 ‘오전 한때 비’로 예보되어 있다. 그렇게 오늘은 반바지와 샌들, 가벼운 재킷으로 하루를 시작하기로 한다. 우산은 번거롭지만 백팩에 하나쯤 넣어두고, 목적지는 실내 위주의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정한다. 사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를 가느냐보다, 그 장소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일지도 모른다. 비가 오면 미술관 그림 앞에서 작가와의 대화로 조용히 시간을 보내면 된다.


흐린 하늘 아래 산방산이 구름에 잠겨 사라지는 모습은, 오히려 햇살이 가득한 날에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장면이다. 자연의 변화무쌍한 변화를 그저 눈으로 잡아챌 수 있고 감탄할 수 있는 것으로 족하다. 날씨는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날씨에 따라 스스로를 유연하게 변화시켜야 한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짜증 내기보다는, 그 비가 만들어내는 풍경에 눈길을 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비 오는 날에는 비 오는 대로, 해 뜨는 날에는 해 뜨는 대로’라는 말처럼, 자연이 만든 하루의 분위기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나만의 기억을 만들어가는 것이 진짜 여행일지 모른다.

여행을 하며 가장 많이 열어보는 것은 지도도, 맛집 리스트도 아니다. 바로 날씨 앱이다. 오늘이 어떤 날씨인지, 몇 시에 비가 올지, 해는 뜨는지 지는지, 바람의 세기는 어떤지. 날씨는 여행의 리듬을 조율하는 지휘자다. 우리는 그 지휘에 따라 걷고, 앉고, 쉴 곳을 정하고, 옷을 고른다. 때로는 그 지휘에 따라 여행의 분위기까지 바뀐다.


지금 내가 바라보는 산방산은 구름 속으로 점점 모습을 감추고 있다. 뚜렷하던 산의 윤곽이 희미해지고, 그 속에서 나는 여행자이자 자연의 일부가 되어 간다. 지금은 비가 잠시 멈추고 짙은 운무가 세상을 감싸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나쁜 하루를 의미하진 않는다. 비도, 구름도, 햇살도 모두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여행은 그 모든 날씨를 포용하며 나를 유연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조금씩 더 자연스러워지고, 순응하며, 때로는 감탄하게 된다.


이렇게 여행은 날씨와 함께 숨 쉬고 움직인다. 날씨가 만들어주는 다양한 색감과 분위기는 여행에 깊이를 더한다. 날씨에 따라 다른 풍경을 보고, 다른 기분을 느끼며,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구름에 덮인 산방산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 순간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선물이라고. 그리고 그 선물은, 언제나 예측불허의 날씨라는 이름과 함께 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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