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행에 들른 동네 책방 이야기

by Lohengrin

가족여행으로 제주에 내려와 산방산 밑 펜션에 자리 잡은 지 어느덧 4일째다. 출발 전 일주일 내내 비가 예보되어 걱정 반, 근심 반으로 짐을 꾸렸는데, 막상 내려와 보니 장마전선이 잠시 주춤거리는 듯했다. 하늘은 잔뜩 구름을 머금고 있지만, 비는 좀처럼 내리지 않는다.


어젯밤, 기어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른 아침, 펜션 잔디밭은 밤새 내린 비로 흠뻑 젖어 있고, 창문을 통해 보이는 산방산은 산허리까지 내려앉은 구름에 휩싸여 있다. 펜션이 차경으로 쓰고 있는 산방산이 만들어낸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장면. 말 그대로 장관이다.

오늘은 오전에만 비 소식이 있어 여유롭게 천천히 움직이기로 했다. 브런치를 먹고 비를 피해 구경할 수 있는 '이타미 준 박물관'으로 향하는 계획을 세운다. 브런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며칠 오가며 눈여겨보았던 작은 동네 책방에 잠시 들렀다. 책방이라기보다 개인 서재에 가까운 공간. 책장의 높이도, 진열된 책들도 아담하다. 철학, 인문,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 다소곳이 놓여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먼저 눈길을 끈 건 벽에 걸린 몇 점의 그림들이다. 처음엔 솔직히 고개를 갸우뚱했다. 유치원생의 낙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꽃, 강아지, 하트 등 익숙한 형상이지만 선은 삐뚤 하고 색은 어색하다. ‘아, 주인장 아이의 그림을 인테리어 삼았구나’ 하고 단정 지었는데, 그 판단은 곧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그림 앞에 선 우리들에게 책방 주인장이 말을 걸어왔다. “이 그림들은 김두석 작가의 작품이에요.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으신 분이죠.”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내가 무심코 폄하했던 그림의 배경에 담긴 사연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그림을 다시 본다. 아니, 다시 본다는 표현보다 ‘다시 느낀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작가는 보지 못한다. 대신 색을 만진다. 앞에 놓여있는 크레용과 물감의 색을 순서대로 하나씩 알려주면, 작가는 기억 속의 색과 감각으로 그림을 그린다.


본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맹목적인 시선은 얼마나 오만하고 단순한가. 우리는 눈으로 본 것을 ‘봤다’고 말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김두석 작가의 그림은 ‘보지 못함’으로부터 비롯된 새로운 시선이었다. 그의 화폭은 형편없을지 몰라도, 그 안에 담긴 절실함과 간절함은 눈앞의 어떤 미술관보다 더 진했다. 그것은 그가 가진 시각의 한계가 아니라, 그가 세상을 느끼는 방식의 확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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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은 단지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림을 통해, 이야기와 시선을 나누는 열린 장소였다. 동네의 독서토론 장소로, 작은 공동체의 감정을 오롯이 담아내는 그릇이자, 책과 그림을 매개로 사람을 이어주는 조용한 울림의 공간이었다. 작지만 크고, 평범하지만 특별한 책방이 아닐 수 없다.


안갯속을 뚫고 이타미 준 박물관에 도착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건축가, 유동룡. 포도호텔, 방주교회, 수풍석박물관, 본태박물관까지, 그의 작품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유기적 구조미로 가득하다. 차갑고 각진 건물이 아닌, 돌과 바람, 햇빛과 시간을 건축 재료로 삼는 작가였다. 그가 만든 공간은 단순한 형태를 넘어서 ‘공간 자체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

돌이켜보면, 김두석 작가와 이타미 준은 너무도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 같지만, 나에게 그 둘은 나란히 놓였다. 천재 건축가의 명징한 곡선과, 시각장애인의 어설픈 하트 모양. 그 간극 속에서 나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무엇으로 세상을 보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눈으로 보는가, 마음으로 보는가. 예술의 본질은 표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닐까.


표현은 다양하다. 정확히 그려진 설계도도, 삐뚤빼뚤한 그림도 세상을 향한 작가의 시선이다. 다만 우리가 그 시선을 얼마나 공명하며 바라볼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나의 시선이 얼마나 좁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깨닫게 된 하루. 그리고 그 시선을 조금은 확장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공간들. 이 여행의 기억은 그렇게, 안개비 내리는 제주에서 시작되어, 작은 책방과 위대한 건축 사이를 잇는 다리 위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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