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묘미는 ‘어디’를 가느냐보다, ‘어떻게’ 가느냐에 있다. 목적지가 정해졌다면, 그다음부터는 전략이다. 낯선 공간에서의 하루하루를 얼마나 내 삶에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을지, 얼마나 여유롭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지에 따라 여행의 만족도는 달라진다. 나는 늘 여행의 본질은 ‘동선 설계’에 있다고 믿는다.
특히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일수록 이 원칙은 더욱 중요해진다. 아이들이나 노년층이 함께할 경우, 과도한 이동은 피로를 불러오고 결국엔 짜증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항상 ‘거점 도시형 여행’을 선호한다. 여행지 전체를 한 번에 섭렵하겠다는 욕심보다는, 주요 도시 몇 곳을 정해 숙소를 잡고 그 주변에서 여유 있게 움직이는 것이다.
지난달의 포르투갈 가족여행도 그랬다. 리스본 3박 4일, 포르투 3박 4일, 그리고 귀국 전 마드리드 1박 2일. 한 나라를 기준으로 동선을 크게 그려 숙소를 정하고, 그 도시에서 반경 2-3시간 내의 볼거리와 맛집들을 탐색해 구글지도에 표시를 해둔다. 중간중간 이동은 기차나 버스로 편안하게. 매일 캐리어를 싸고 풀며 이동하는 방식은 피로할 뿐 아니라 집중도도 떨어진다. 무엇보다 여행 중 가장 쓸모없는 시간은 ‘쓸데없이 이동하는 시간’이라는 것이 내 오랜 여행 경험의 결론이다. 해외여행을 할 때는 구글지도가 신이고 국내여행을 할 때는 네이버 지도가 신이다.
이번 제주도 가족여행 역시 그러한 방식으로 짜였다. 흔히들 3박 4일 일정으로 서귀포나 제주 시내에 숙소를 정해 해안선을 따라 움직이지만, 나는 일주일이란 시간을 여유 있게 활용하기 위해 제주를 넷으로 나눴다. 제주도는 의외로 크다. ‘한 바퀴 돌아보자’는 생각은 섣부른 욕심이다. 그보다는 ‘지역마다 머무는 전략’이 훨씬 낫다. 남서쪽 산방산, 북서쪽 협재, 그리고 동쪽 송당마을. 이렇게 세 거점을 중심으로 숙소를 잡고 그 주변을 둘러본다.
첫 숙소는 산방산 아래의 펜션이었다. 이곳에서의 2박 3일은 말 그대로 '제주스러움'의 진수였다. 용머리해안에서 시작해 루나폴의 이색적인 감성, 송악산 둘레길의 시원한 풍광, 그리고 파더스가든의 수국 정원은 제주가 지닌 자연의 다양성을 한 폭에 펼쳐 볼 수 있었다. 저녁에는 서귀포 올레시장에 들러 싱싱한 횟감과 만두, 튀김, 오메기떡 등 여러 먹거리를 사서 펜션을 돌아와 먹었다. 그리고 '이타미 준 미술관'에서는 건축과 자연이 교차하는 순간을 경험했다. 조용히 흐르는 빗소리와 함께 보는 건축물은 그 자체로 작품이었다.
이후 북서쪽 협재로 숙소를 옮겨 다시 2박 3일을 보냈다. 고운 모래 해수욕장의 맑고 투명한 바닷물은 마음의 때까지 씻겨내는 기분이 들어 이틀 오후 내내 바닷물에 들어가 있었다. 오전 시간에 찾은 넥슨컴퓨터박물관은 단순한 놀이공간이 아닌, 우리 세대와 자녀 세대가 기술을 통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동쪽 중산간 지역송당마을에 2박 3일 숙소를 잡았다. 이곳은 제주 특유의 고즈넉함과 여유가 배어 있는 곳이다. 비자림과 가까워 공기도 맑고, 무엇보다도 상업화가 덜 되어 있어 진짜 제주의 일상을 마주할 수 있다. 오는 길에 예전에도 몇 번 들른 돌문화공원을 다시 찾았다. 마침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마주한 ‘설문대할망전시관’은 이번 여행의 숨은 하이라이트였다. 막 오픈한 전시관이라 입장료도 무료였고, 도슨트의 해설은 그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전시를 그냥 훑고 지나가는 것과 누군가의 이야기로 들어보는 것은 천지차이다. 나는 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해설을 듣는 쪽을 선택한다. 혼자서 이해할 수 없는 결까지 도달하려면 전문가의 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주의 역사와 문화와 신화 그리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는 귀한 기회다.
지금은 여행 일정의 2/3 지점. 오늘 아침은 당오름으로 아침 산책을 다녀올 예정이다. 그 후엔 다시 비자림숲을 찾아갈 계획이다. 같은 숲이라도 다른 시간, 다른 감각으로 마주하면 전혀 다른 풍경이 된다. 제주의 숲은 그런 점에서 인간의 내면과 닮았다. 고요하지만 변화무쌍하고, 때로는 거칠지만 결국 품어주는 곳.
여행은 목적지가 아닌 과정이다. 어떤 길을 택하고, 누구와 걷고, 어떤 방식으로 머무느냐가 더 중요하다. 내가 세운 동선 속에서 만난 제주의 하루하루는 단순한 관광 이상의 경험이다. 여행지에서의 동선이란 단지 이동의 경로가 아니라 기억의 궤적이다. 그 위에 웃음이 쌓이고, 대화가 새겨지며, 다시 돌아올 이유가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