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도 속도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 제주에서 보통 자동차를 렌트할 경우, 내비게이터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앞만 보고 가게 된다. 운전하지 않는 동행자들은 그나마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비자숲의 나무나 조금 멀리 오름들의 둥근 선들을 감상할 수 있지만 운전자는 오직 앞서가는 차량의 꽁무니만 쳐다보고 갈 뿐이다. 그러다 보니 여행의 기억은 연결되지 않고 관광지 몇 곳만 듬성듬성 떠오르게 된다.
반면 천천히 걷게 되면 자세히 보게 되고 그러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게 된다. "자세히 봐야 좋아하게 되고 오래 봐야 사랑하게 된다"라는 말은 여행에서도 진리다.
제주도 동쪽 산간마을인 송당리가 요즘 제주에서 뜨는 소품 샵들이 있다는 곳이다. 그렇다고 제주나 서귀포에 있는 쇼핑가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문패처럼 가게 이름이 붙어있고, 매장이래 봐야 10평 남짓한 소품샵 10여 개 점포가 있고 중간중간 작은 카페 베이커리, 책방도 있다. 모두 새로 지은 건물이 아니고 길가에 있던 가정집들을 개조했다. 차를 타고 지나갔다면 이 거리에 이렇게 여러 소품 샵들이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곳이다.
나는 우연찮게 제주도에 일주일을 머무는 마지막 2박 3일 일정의 숙소를 이곳에 잡았다. 그래서 이 송당마을 소품 샵들을 속속들이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어제도 아침 운동으로 숙소 근처의 '당오름'에 올라갔다 내려오며 일찍 문을 연 소품 샵 몇 군데를 들어가 봤다. 여성 취향의 다양한 소품들로 꾸며진 곳들이라 전시된 상품들이 내 눈에는 들어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기자기함이나 칼라플한 전시며 가게마다 나름 개성 있는 물건들임은 한눈에 알아챌 수 있다. 와이프와 큰 딸아이는 소품 샵에 들를 때마다 작은 물건 하나씩을 산다. 그래봐야 작은 화분이랑, 예쁜 키 링 그리고 기념품 정도다. '송당의 아침'이라는 작은 베이커리에서 빵도 두 개 정도 사본다. 하루 종일 움직일 텐데 간식거리로 먹을 요량이다. 그리고 들른 곳이 '동당서림'이라는 정말 작은 책방이다. 이번 여행에 처음 묵었던 산방산 밑에도 '어떤 생각'이라는 동네 책방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이곳은 더 작은 책방이다.
'동당서림'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의 서가와 책방 가운데 매대에 놓여있는 책들이 전부다. 그런데 전시되어 있는 책들의 표지에 책방지기의 글씨가 쓰인 메모지가 하나씩 붙어 있다. 책방지기가 그 책을 읽고 가장 마음에 와닿는 문구 한 문장씩을 써놓은 것이다. 책을 들춰보지 않아도 그 책이 어떤 내용의 책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이를테면 강준서 작가가 쓴 '맑음에 대하여'란 책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붙어 있다.
"맑음에 대하여(About Clear) - 맑음이란 아픔도 볼 수 있는 투명성. 맑은 눈으로 슬픔을 바로 보고, 잠시 내려앉은 어둠 앞에서도 본연의 생기를 피워내는 삶. 나는 당신의 현재 속에 존재하지만 당신의 미래를 응원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충분히 고민하고 사랑하는 사람 = 맑음과 맑음의 다름을 보며 투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 = 책방지기가 좋아하는 책"
책방지기의 감성과 배려가 책 한 권 한 권에 배어있다. 이 감성과 배려가 이렇게 외진 제주 산골마을에서 책향을 풍기며 살아남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이 책방도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건네는 장소이자 감성과 배려를 파는 곳이었다.
빨리 걸었다면 전혀 알지 못했고 들어가 보지 않았다면 볼 수 없는 장면이자 감성이다.
여행은 풍경을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머물고 느끼고 관찰하는 삶의 연장선이다. 여행은 많이 보려고 하는 것보다 천천히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자기가 살던 삶의 터전을 떠나 타인의 삶으로 들어가 보고 타지의 풍경에 빠져보는 것이 여행일진대 우리는 너무 스쳐가듯 지나쳐가느라 주마간산 여행을 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이제는 속도를 늦출 때다. 그래야 비로소 볼 수 있고 보이게 된다. 여행은 그렇게 보는 눈을 높이고 넓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