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로 대신한 문패가 잃어버린 것

by Lohengrin

아파트가 대표 주거 환경이 되면서 사라진 것 중의 하나가, 주인장 이름이 새겨진 문패(門牌; a nameplate))다.


보통 아파트 현관입구에 있는 우편함에도 아파트 해당 호수만 표시되어 있고 아파트 현관문에도 804호라는 번호표시가 문패를 대신하고 있다. 아파트가 성행하기 전, 단독주택이 주거문화의 대표였을 당시에는, 집을 사거나 짓고 대문옆 기둥에 주인장의 이름을 새긴 문패를 달아 누구네 집인지를 공표했다. 집을 산 사람의 뿌듯함이 문패에 그대로 새겨진다. 정겹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요즘은 집집마다 달았던 이 문패를 보기가 쉽지 않다. 특히 고급 주택가라고 하는 곳을 가봐도 문패를 단 집은 거의 볼 수가 없다. 개인 프라이버시의 문제도 있고 범죄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이유가 작동한 듯하다. 지금은 거리이름과 집 지번에 새겨진 위치표시가 집주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담벼락에 붙어있다. 낭만이 사라진 시대라고나 할까?


사실 문패를 단다는 행위는 방 한 칸 없던 가난에서 벗어나 작지만 번듯한 집 하나 마련해, 월세살이로 쫓겨 다니지 않고 전세 옮기느라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쐐기를 박는 일이다. 이제 나도 두 다리 펴고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선언이었다. 문패에 이름 적힌 사람의 자부심이자 자긍심이라 할 수 있다.


나무 문패에 한자로 이름 석 자가 떡 하니 쓰여있거나 조금 잘 나가는 사람이거나 집이 주변에 비해 크다면 대리석에 부부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기도 했다. 그래서 그 집 앞을 지나는 사람들도, 문패 걸린 집안에 있는 사람의 위상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문패가 사라진 요즘은 어떤가? 담장 너머 누가 사는지 조차 모른다. 아니 알 필요조차 없고 묻지도 않는다. 새벽이면 신문배달원이 대문 밑으로 신문을 밀어 넣고 하얀 우유병이 문패 아래에 달랑달랑 달려있는 그런 정겨움조차 사라졌다.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는 이름을 잃어버렸다. 번호만 남았다. 102동 804호. 현관문에 붙은 차가운 숫자들 사이에는 정체성이 없다. 거기 누가 사는지는 알 수 없다. 묻지도 않는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런 식으로 도시는 점점 더 익명성이 지배하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문패는 단순한 이름표가 아니다. 그 집의 역사, 가족의 이야기, 한 사람의 성취와 삶의 발자취가 그 안에 담겨 있다. 땀 흘려 번 돈으로 마련한 집, 월세살이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내 집'을 가졌을 때, 사람들은 맨 먼저 문패를 달았다. 그건 선언이었다. “이 집은 내 것이다.” “나는 여기 산다.” “여기가 내 자리다.” 그 이름 석 자는 생애의 한 이정표였고, 생존을 넘어선 존엄의 표식이었다.


그 문패는 또 이웃과의 관계를 시작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아, 여긴 김 선생님 댁이구나." "저기 박 여사님은 꽃을 참 좋아하시지." 이름을 알고 얼굴을 알면 인사도 하게 되고, 계절마다 김치도 나누고, 아이들 시험 얘기도 하게 된다. 문패는 공동체의 연결고리였다.


하지만 아파트가 주거의 기본 단위가 된 지금, 우리는 벽 너머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통성명도 없이 5년, 10년을 산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고개만 끄덕일 뿐, 이름은커녕 직업도, 가족관계도 알지 못한 채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존'한다. 공동체는 구조적으로 분해되었고, 인간관계는 최소화되었다. 그렇게 도시의 삶은 점점 더 쓸쓸해졌다.


문패가 사라진 이유는 여러 가지다. 무엇보다 프라이버시와 보안 때문일 것이다. 이름이 공개되면 개인정보가 노출된다는 우려,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이 문패를 밀어냈다. 고급 주택가일수록 문패가 없고, 대리석 문패는 이제 고풍스러운 유물처럼 느껴진다. 대신 행정구역 명칭과 번지수, 그 위에 덧붙여진 QR코드와 디지털 도어록이 거주자의 존재를 대신한다. 하지만 아무리 합리적인 이유라 해도, 우리는 동시에 '정서'와 '감정'을 잃었다. 문패가 사라진 도시에는 낭만이 없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문패의 부재는 단순한 표식의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공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가,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문화적, 정서적 단절을 뜻한다. 집은 더 이상 삶의 총체적 흔적이 아니라, 투자자산이나 기능적 거주 공간이 되었다. 집에 이름을 걸지 않는 것은, 이제 그 집이 나의 연장이 아니라는 것, 그 공간에서의 삶이 자긍심이 아닌 ‘소비’의 일부가 되었음을 방증한다.


돌이켜보면 문패란 참 다정한 장치였다. 이름을 걸고, 이름을 알리고, 서로를 알아가는 시작이었다. 누군가의 대문 앞에 ‘홍길동’라는 이름이 걸려 있으면, 그 사람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의 서사로 존재했다. 나무 위에 새겨진 이름 세 글자는, 가족을 위해 성실히 살아온 누군가의 인생이었다.


도시는 숫자를 기억하지만, 사람은 이름을 기억한다. 우리가 숫자 뒤에 숨어 살아갈수록, 이름 없는 존재가 되어갈수록, 도시는 더 삭막하고 외로워진다. 문패가 사라진 자리에, 우리는 무엇을 걸고 살고 있는가. 고층 건물 아파트 창문마다 불이 켜져 있어도, 그 안에 누구의 삶이 있는지 알 수 없다면, 그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다시 묻고 싶다. 우리는 왜 이름을 내걸지 않는가? 우리는 왜 서로를 모른 채 살아가야 하는가? 문패를 단다는 것은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이고, 그 사람의 삶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것은 소유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행위다. 우리가 다시 이름을 걸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그건 분명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이 될 것이다.


언젠가 다시, 대문 옆 나무 문패 하나에 마음이 머무는 날이 오기를. 이름 석 자가 담긴 그 작은 판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커다란 시작이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문패 자체가 아니라, 문패가 가능하게 했던 관계와 정서, 그리고 ‘살아 있음’의 증거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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