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것은 곧 리듬을 갖는 일이다. 리듬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시작부터 생명의 본성까지 관통하는 운동의 구조이자 시간의 호흡이다.
물리학적으로 보자면, 이 우주는 완전한 대칭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물질과 반물질의 1/10억의 차이, 그 미세한 비대칭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가능하게 했다. 완벽한 대칭 속에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 균형된 고요함 그 자체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깨짐', 바로 리듬의 탄생점이다. 균형이 무너짐으로써 운동이 시작되었고, 시간은 흐르기 시작했다. 이는 곧 모든 생명체의 발걸음, 심장박동, 말의 억양, 음악의 파동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걷는 동작도 리듬이 맞지 않으면 어색해지고, 노래의 리듬이 엇나가면 우리는 '불협화음'이라 느낀다. 이것은 단순히 청각의 문제를 넘어선다. 우리의 삶과 언어, 감정, 관계 전반이 리듬의 조화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 자체로 리듬을 내포하고 있다. 말에는 엑센트가 있고, 대화에는 호흡이 있다. 리듬 없는 말은 알아듣기 힘들고, 핵심을 전달하지 못한다. 반대로 정확한 위치에 억양을 실어 말할 줄 아는 사람은 이야기의 중심을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리듬은 단순히 형식이 아니라, 의미를 실어 나르는 그릇이다.
이런 리듬의 개념은 예술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은 지옥, 연옥, 천국을 3부로 나누고, 각 부는 33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운문은 테르차 리마(terza rima, ABA BCB CDC...)의 리듬을 따라 흘러간다. 단테가 살았던 14세기 초, 대다수 사람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졌고, 그 구전에는 노래처럼 흐르는 리듬이 필요했다. 피렌체어로 낭송되는 단테의 시는 당시 사람들의 귀에 멜로디처럼 울렸다고 한다. 리듬은 단순히 소리의 높낮이가 아니라, 내용의 흐름과 감정의 파장을 일으키는 원형적 에너지였다.
리듬은 타고나는 감각이기도 하지만 훈련을 통해 길러지는 기술이기도 하다. 감동을 억누르면 여운이 생기고, 큰 의미를 보류하면 그 속에서 작은 의미들이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리듬의 굴곡이다. 예술가는 바로 이 굴곡을 표현하는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시인은 말하고 싶은 걸 끝내 말하지 않아 독자의 상상력을 유도하고, 코미디언은 끝내 웃지 않음으로써 관객을 웃게 만든다. 이런 절제와 폭발, 강약과 고요의 교차 속에서 우리는 예술이라는 리듬을 마주한다.
AI도 마찬가지다. AI가 문장을 생성할 때, 다음에 올 가능성이 높은 단어를 예측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 구사와 다르지 않다. 인간도 말할 때, 앞 문맥에서 이어질 리듬을 직관적으로 예측하며 말한다. 따라서 언어란 확률적 구조에 기반한 리듬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리듬은 반복에서 출발하지만, 반복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복 속에서 차이(difference)가 발생하고, 이 차이가 우리의 관심을 자극한다. 소리의 반복 속에서 차이가 발생하면 음악이 되고, 공간의 반복 속에서 차이가 드러나면 미술이 된다. 이처럼 예술이란 결국 차이의 리듬인 셈이다. 반복의 결합과 분기, 차이와 충돌이 우연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가 필연을 구성한다. 우리는 그런 리듬 속에서 살아간다.
리듬은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리듬이 없다면 존재는 형태를 얻지 못하고, 세계는 공허한 진동 속에 머물 뿐이다. 리듬은 보이지 않지만, 모든 존재를 관통하는 심연의 구조다. 생명의 탄생, 언어의 흐름, 예술의 울림, 감정의 파장, 우주의 진동… 이 모든 것은 리듬이라는 단어 하나로 수렴된다.
결국 우리는 리듬 안에서 살아간다. 걷고, 말하고, 듣고, 노래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며. 존재는 리듬의 중첩이 빚어낸 하나의 파동이다. 그리고 리듬이 지속되는 한,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