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知識人 ; intellectual)에 대한 정의는 각양각색이다. 어떻게 개념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의 차이가 상당하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사람' 정도로 정의 내리기도 하고 인텔리겐차의 계급차이로 해석해, 민중 위에 군림하는 권력 지배층을 일컫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교육을 받고 높은 자리에 있는 기득권 지배층이라고 모두 지식인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서울대 나와도 무식함을 증명한 모 인간이 있듯이 천차만별의 군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가 잘못 가르친 걸까? 그 인간이 잘못된 걸까?
지식인이라는 용어 개념 하나에 계속 물음표를 붙이는 이유는 지식인의 역할과 행동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 때문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하고 잘못에 대해서는 분연히 지적하고 고쳐내는 역할을 하는 게 지식인일진대, 위선과 비겁, 배신과 비합리, 일신안위를 위해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의 모습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식을 배경으로 지배하려는 자를 지식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지식을 이용한 기회주의자이자 파렴치한일 뿐이다.
'얕은 지식인'을 경계해야 한다. 밖과 옆을 둘러볼 필요도 없다. 나의 내면에 대한 질문이다.
무얼 알고 무얼 모르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면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에 대한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상식적인 수준의 앎을 가지고 세상을 일견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이었던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신독 하지 않아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배울 만큼 배웠다고 하는 한국의 지식인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단다.
60세 이후 퇴직을 하고 나서 일상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단다. 한 달에 책을 몇 권 읽고 있느냐를 보면 된단다.
지식인이라고 자처했던 대부분 한국인들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책을 손에서 놓는다. 책 읽을 여유가 없이 살았다고 위안을 삼으며, 책 대신 골프채를 손에 든다. 지식인과 지배층의 개념 자체가 지식에서 행위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어쩌다 한번 손에 드는 책은 골치 아픈 내용보다는 쉽고 재미있는 흥밋거리 내용이거나 어디 문학상이라도 받았거나 한강 작가처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니 나도 한번 읽어봐야지 수준의 접근 정도란다.
가슴이 뜨끔하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지식의 간절함을 놓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고,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삶에 대한 태도이자 지식에 대한 태도의 결여다.
책에 대한 애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가 선물로 준 책은 거의 읽지 않고 있음도 알게 된다. 책 선물을 하는 사람이 심사숙해서 고른 책일 테고 심지어 속표지에 감상과 사인을 한 책을 받기도 하는데 그런 책일수록 서문 이상을 넘겨 본 적이 거의 없다. 나는 책을 내 돈으로 사야 읽는 스타일이다. 책 산 돈이 아까워서라도 읽게 된다. 책을 돈 주고 사야 책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고 엄중하게 된다.
돈을 주고 산다는 것은 신중했다는 의미다. 추천을 받았던, 서평을 보고 관심을 가졌던, 책 속에 들어있는 어떤 내용의 궁금증이 있다는 것이다. 책장을 넘기는 일은 그다음의 일이다.
책 읽기 최고의 고수는 "책을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 지켜보는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이제는 책장에 꽂힌 책을 하나씩 다시 꺼내 먼지를 털고 읽어볼 일이다.
또 한편으로는 손에 든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 소일거리로 책을 읽는다, 책 읽는 것이 취미다 수준으로 책을 읽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취미로 읽으면 말 그대로 중구난방으로 읽게 된다. 취미로 읽는 책은, 책을 덮는 순간 휘발되어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시간 죽이기 수단으로 책을 활용했을 뿐이다.
그래서 책을 손에 잡을 때는 신중해야 하고 엄선해야 한다. 어디 한번 읽어볼까 가 아니고 읽을 필요가 있는 깊이가 있어야 한다.
책은 타인의 생각이 담겨있는 지식의 창고다. 무제한의 조합으로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지식의 일부를 자기만의 논리로 엮어낸 사례집이고 이를 읽는다는 것은 그 경우의 수에 대한 예를 얻어 나의 삶에 참조로 삼기 위함이다. 지식의 한계와 범위에 끝이 없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그래도 읽는 만큼 삶의 확실함에 대한 확률을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퇴직하고 부재차한(不在此限 ; 어떤 규정이나 한계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벗어남)의 상태에 있을 때 신독(愼獨 ; 남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여 말과 행동을 삼감)하는 자세가 그래서 필요하다.
"평생 먹고살기 위해 고생했으니 이제 남은 생을 즐기고 누려라"는 유혹은 사탕발림이다. 삶은 그렇게 달콤하지 않다. 죽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궁금증을 찾아가고 행동하며 달콤한지 아닌지 혀로 핥아보는 일이다. 그래서 지식인은 그 달콤함을 달다고 표현해 내는 사람이다. 달콤함을 쓰다고 말하고 혼자만 달콤함을 누리는 위선자가 돼서는 안된다. 공부의 길, 지식의 길은 나누는 데 있다. 궁금한 것을 묻고 찾아가는 길, 그것이 평생 삶의 반려자가 되어야 한다. 그때서야 사는 게 재미있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