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곧 ‘불확실성’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과정이다. 매일의 선택과 행동은 미래에 대한 알 수 없음과 마주하는 연속된 순간들이다.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는 것을, 조금 더 확실하게 바꾸려는 욕망 속에 산다. 불확실성을 없애고 그것을 확신으로 전환하는 행위를 우리는 ‘행동’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한 동기 부여 문구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불확실성을 끌어안고만 있지 말고, 부딪혀서 공간과 상황을 바꾸라는 실천적 권유다.
행동의 결과가 실패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패는 단순히 ‘안 좋은 결과’가 아니라, 불확실성을 하나 제거한 확실한 데이터다. 한 번의 실패는 성공 확률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셈이다. 실패는 가능성을 닫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 경로를 좁혀주는 필터다.
불확실성은 종종 불안과 공포,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이 불확실성을 때로 즐기기도 한다. 카지노와 도박이 대표적이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스릴과 긴장은 매혹적인 유혹이 된다. 이것은 단순한 심리적 특이성이 아니라, 도파민 시스템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려는 생존 본능에서 분비되는 도파민과, 도박 중독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은 뇌가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불확실성을 피하려 하고, 어떤 이는 그 불확실성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든다. 생존 본능과 쾌락 추구 본능이 같은 생화학적 회로를 타고 흐르기 때문이다.
이 불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불안을 가장 교묘하게 이용해 온 것이 사기, 주술, 점술, 종교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왜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는지 알 수 없던 시절, 전염병이 원인 불명으로 퍼질 때, 사람들은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답을 절실히 원했다. 그 욕구를 채워준 것이 주술사, 관상가, 심지어 혈액형 성격설이나 MBTI와 같은 현대의 유사과학적 도구들이다. ‘정답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인류의 오랜 심리적 패턴이다.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는 신화와 종교가, 현대 사회에서는 심리 테스트나 ‘빅데이터 기반’이라는 이름의 상업적 확률 분석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조차 그랬다. 그는 양자역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나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이 보여준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개념을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뉴턴역학적 결정론에 익숙한 그의 세계관으로는, 자연이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위대한 지성도 이럴진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조차 혼동한다. 건강이나 운동과 관련된 경험담을 인과관계의 증거로 오해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걸 하니까 좋다더라”, “이걸 먹었더니 살이 빠졌다더라”와 같은 말에 쉽게 혹하는 이유다.
불확실성에 대한 판단이 너무 직관에만 의존할 때 문제가 생긴다. 직관은 때로 유용하지만, 오류를 범하기 쉽다.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반복된 훈련과 연습이다. 훈련은 직관이 만든 왜곡을 보정하고,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예술가와 장인들의 세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피카소와 같은 화가, 임윤찬 같은 피아니스트가 무대 위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무수한 반복 훈련 덕분이다.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은 “하루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평론가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관객이 안다.”라고 했다. 반복 훈련은 불확실성을 줄이는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길이다.
불확실성은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 그것은 삶의 구조 자체에 내재된 조건이다. 오히려 우리는 불확실성을 줄이는 과정에서 배움을 얻고, 자신을 성장시킨다. 실패는 그 과정의 일부이고, 두려움은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문 앞에서 마주치는 통과의례다.
그러니 불확실성을 무조건 없애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실험하면서 조금씩 우리의 판단을 정밀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과학자가 가설을 세우고 검증을 반복하듯, 우리는 삶이라는 실험실에서 하루하루 데이터를 쌓아가는 과정이다.
결국 ‘산다’는 것은 불확실성과 함께 어울리는 일이다. 그 삶을 더 능숙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훈련하고, 경험하고, 실패를 품는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의 삶 전체를 되돌아보고 회상하는 날이 올 때, 그 긴 여정의 언덕과 골짜기마다 흰 깃발 이정표 하나씩을 잘 세우고 묵묵히 걸어왔음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