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콜로세움에는 무려 80개의 아치형 출입문이 있었다. 수만 명의 관중이 빠르게 입장하고 퇴장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이 문들 중, 단 두 개는 오직 검투사만을 위한 문이었다. 포르타 사니비바리아(Porta Sanivivaria)와 포르타 리비티나(Porta Libitina) 다. 이 두 문이야말로 생과 사를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살아나가는 문’이라 불린 사니비바리아는 승리한 검투사가 걸어 나가는 문이고, 죽음의 여신 리비티나의 이름을 딴 리비티나는 경기에서 패해 들것에 실려 나가는 이들의 출구였다.
콜로세움의 한복판에서 칼을 쥔 검투사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문으로 나갈지, 그 선택권은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그가 오를 경기장은 한낱 무대가 아니라 생존을 건 심판의 공간이었다. 승자는 걸어 나가고 패자는 실려 나간다. 인간의 의지와 운명이 교차하는 그 두 개의 문 앞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의 제도이자 구경거리가 되었다.
관중의 시선, 검투사의 심경, 그리고 황제의 권력욕이 얽힌 이 구조물은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라 인간의 잔혹함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검투사에게는 “살아 나가고 싶다”는 절박함이 잔혹함을 부추겼고, 관중에게는 “누가 어떤 문으로 나갈 것인가” 하는 호기심이 피의 광경을 더욱 자극했다.
두 검투사가 모두 리비티나의 문으로 실려 나갈 수는 있으나, 동시에 사니비바리아로 걸어 나올 수는 없다. 황제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생명을 연장시켜 줄 수는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다음 경기까지의 유예일 뿐이었다. 결국 언젠가 리비티나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 검투사의 숙명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환호와 명예의 환상에 취해, 목숨을 담보로 싸움을 계속했다.
고대 로마의 검투사 경기를 잔혹하다고 손가락질하지만, 그 본능은 오늘날 ‘격투기’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심판이 있고, 무기가 없고, 룰이 세분화되어 있을 뿐 본질은 다르지 않다. 인간의 피와 승부욕이 맞붙는 ‘문명화된 경기장’ 일뿐이다. 콜로세움의 모래바닥이 현대의 옥타곤(Octagon)으로 바뀌었을 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싸움 본능은 동일하다. 옥타곤의 출입문은 하나다.
살아 나가는 문만 있을 뿐, 죽음을 상징하는 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패배나 부상이 존재하지 않는 듯, 오로지 승리만이 존재하는 공간처럼 꾸며져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그 문을 나서는 모든 선수는 승리의 포효 뒤에 찾아오는 부상과 고통, 그리고 잊힘을 감수해야 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경기장에 문이 하나뿐이라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착각의 상징이다. 돈과 명예, 인기와 스폰서십을 위해 몸을 혹사시키는 선수들, 그리고 그들을 향해 환호하는 관중들. 콜로세움의 피비린내는 사라졌지만, 그 본질적 구조는 여전하다.
나는 격투기를 단순히 힘과 기술을 겨루는 스포츠로 보지 않는다. 상대를 제압하고 쓰러뜨려야만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어떻게 진정한 스포츠일 수 있을까. 권투든 태권도든, 승패를 가르는 구조가 상대의 패배를 전제로 하는 한, 그 속엔 여전히 ‘리비티나의 문’이 숨겨져 있다. 물론 모든 격투기가 폭력을 찬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진적 사회일수록,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더 열광한다. 우리도 1970년대만 해도 그랬다. 홍수환, 유재두, 김기수 같은 선수들의 경기날이면 온 국민이 TV 앞에 모였다. 지금은 어떤가? 권투는 거의 사라졌다. 불타오르던 관심은 재도 남지 않았다. 그만큼 볼거리가 다양해지고, 폭력을 대신할 수 있는 문화적 해소구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지만, ‘대리 사냥본능’을 해소하려는 인간의 심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결국 인간은 사냥본능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 다만 그것을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형태, 즉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해소할 뿐이다. 그것은 욕망의 순화이자, 문명의 타협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여전히 콜로세움의 경기장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경기장 안에 있다.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고,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인생의 경기장 말이다. 누군가는 이미 경기장에 들어서 있고, 누군가는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삶의 경기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삶은 ‘잠시 멈출 수 없는 경기’다. 포르타 사니비바리아와 리비티나의 문은 콜로세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을 버텨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 속에도 존재한다. 하루하루 버티며, 어떤 문으로 나가게 될지 알 수 없는 생의 경기장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
그러므로 삶을 대하는 태도는 비장하되, 의연해야 한다. 어떤 문으로 나갈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걸어서 나가겠다’는 의지 하나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검투사에게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공통된 생존의 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