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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모독

by Lohengrin

차가워진 공기가 옷깃을 여미게 하는 아침입니다. 서울의 아침 기온이 영상 3도 내외를 기록하는 것을 보니, 벌써 깊은 산봉우리나 휴전선 부근의 전방 지역에는 하얀 서리가 소복이 내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가을은 정말 흐르는 물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계절입니다. 아파트 단지 정원의 나무들도 마치 서둘러 겨울을 맞이하려는 듯, 충분히 농익지 못한 채 황급히 단풍 색을 입히고 있습니다. 그 빛깔이 선명함보다는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것은, 우리의 마음처럼 가을이 너무 짧아졌다는 계절의 변화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 쌀쌀함은 우리가 겉옷의 두께를 한 단계 올리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신호입니다.


'영상 3도 정도를 가지고 춥다고 할 수 있나?'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추위와 더위의 기준은 절대적인 온도가 아니라 바로 '어제'의 기온입니다. 어제보다 낮은 온도를 기록했다면 우리 몸은 즉각적으로 춥다고 반응합니다. 그것도 일교차가 10도 이상 벌어지는 환절기에는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녁 뉴스에서 벌써부터 두꺼운 패딩을 입거나 목도리를 두른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우리 몸이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옷의 두께를 늘려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저만 해도 집에서 카디건을 걸치고 있는 시간이 부쩍 길어진 것을 체감합니다.

이런 계절의 변화 속에서 문득 30~40년 전 라디오 아침 일기예보가 떠오릅니다. 당시의 기상 방송은 유난히 자세했습니다. 거의 예외 없이 휴전선 근처의 높은 산들의 기온은 물론, 서해안의 백령도를 비롯한 대청도, 소청도의 날씨와 파고까지 빠짐없이 전달해 주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정보 채널이 제한적이었던 시기, 라디오라는 매체의 특성상 모든 정보를 하나하나 말로 전달해야 했던 이유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냉전 시대의 산물인 긴장감과 전방 초소에 자식들을 보낸 부모들의 염려가 담겨 있었습니다. 당시 육군 복무 기간은 33개월에 달했으니, 아들이 복무하는 곳의 날씨라도 전해 듣고 싶어 했던 부모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린 것이거나, 의도적으로 긴장감을 유지하려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시절의 날씨 정보는 단순한 기상 예보를 넘어선, 시대의 초상이었습니다.


현재의 쌀쌀함이 우리에게 '옷'을 입을 것을 명령하는 가운데, 문득 근원적인 질문 하나가 떠오릅니다. 옷을 입어 체온을 유지하기 시작한 호모사피엔스는 과연 언제, 왜 온몸의 털을 벗어던졌을까요? 모든 포유류가 보온을 위해 털을 지니고 있었을 텐데, 인류만 옷을 입음으로써 털이 줄어든 것일까요? 왜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영장류들은 여전히 온몸에 무성한 털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만약 털이 보온을 위한 진화의 산물이라면, 왜 인류는 보온 기능을 스스로 포기하고 문화적 도구인 옷에 의존하게 되었을까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지구의 기온 변화와 인류의 진화 과정을 함께 들여다보는 거대한 공진화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합니다. 우선 털의 진화가 추위가 아닌 '더위'와 관련이 깊었다는 놀라운 사실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공룡이 지배했던 중생대는 시베리아 대규모 현무암 분출과 같은 지각 활동으로 인해 대기 기온이 현재보다 무려 10도 가까이 높았습니다. 특히 중생대 초기는 지구의 대륙들이 판게아라는 하나의 초대륙을 이루고 있어 해안선이 적고 고온 건조한 환경이었습니다. 이 고온 건조한 자연환경에 모든 생명체가 적응 진화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핵심은 '체내 수분 증발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파충류가 피부를 거칠게 만들어 방수 기능을 강화했다면, 포유류는 털을 이용해 물 증발을 막는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털의 모낭에는 피지선이 있어 지방 지질을 분비하는데, 이 기름기가 털을 타고 올라가 온몸을 덮어줌으로써 수분 증발을 막아주는 '빨대' 또는 '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마치 촛농이 심지를 타고 올라가듯, 털이 온몸을 기름으로 코팅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고온 건조한 외부 환경에서도 털을 진화시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진화한 털은 신생대에 들어서 간빙기와 빙하기가 교차하는 환경 속에서 비로소 '보온'이라는 중요한 2차적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약 20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부터 털이 점차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호모족은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탁월한 '지구력'을 바탕으로 사냥 방식을 진화시켰습니다. 바로 먹잇감을 끝까지 추격해 지치게 만드는 '장거리 지구력 사냥'입니다. 끊임없이 추격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장시간 활동 중 발생하는 신체의 열을 조절하는 능력, 즉 체온 조절 능력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인류의 몸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온몸을 덮었던 털이 사라지고, 대신 피부 전체에 땀샘이 발달했습니다. 땀을 흘려 피부 표면에서 수분이 증발하는 기화열을 통해 체온을 조절하는 방식이 극한의 효율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꺼운 털은 땀의 증발을 막아 오히려 체온 발산을 방해하는 '단열재' 역할을 하기에, 장거리 사냥을 위해서는 털을 벗어던지는 것이 생존에 유리한 진화였습니다. 더욱이, 초기 인류는 문화적 기술 진화를 통해 물병을 휴대하고 물을 보충하는 능력을 갖추었기에, 땀을 지속적으로 흘리는 체온 조절 시스템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털의 진화가 추위가 아닌 더위와 관계있었고, 털의 상실은 인류의 뛰어난 장거리 사냥 능력과 땀을 통한 체온 조절 능력이라는 놀라운 공진화 덕분인 것입니다.


결국 인류가 털을 벗은 것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위와 사냥 중 발생하는 열을 효과적으로 식히기 위해서'입니다. 옷을 입는 문화적 진화는 이 진화적 선택의 단점을 보완해 주는 탁월한 해답이 되었고, 인류는 유연한 생존 방식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기온이 한 자릿수로 내려가 벌써 패딩과 장갑, 목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가을의 모독'처럼 느껴질지라도, 우리의 몸은 수백만 년 전부터 내려온 생존 본능에 따라 옷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짧은 가을, 낙엽이 갈색으로 물든 산책길을 트렌치코트의 깃을 멋지게 세우고 걸어보는 낭만적인 풍경을 놓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라진 계절에 대한 회상은, 결국 인류가 극복하고 발전시켜 온 놀라운 진화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의미 있는 시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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