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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책의 엄중함

by Lohengrin

12월 1일입니다.


2025년도 슬슬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작동하는 시기입니다. 벌써 많은 송년 모임들을 11월부터 지 나왔을 터입니다. 골프 납회도 이미 했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12월에는 일정이 비는 날들이 제법 많이 보입니다. 12월 20일 이후부터 연말까지 열흘 정도는 아예 여백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겠다는 심사의 발로이기도하겠고 "연말에는 다들 바쁠 거야"라는 지레짐작이 빚은 공백일 수도 있을 겁니다.


어제도 11월 한 달간 매주 일요일마다 오프라인 강좌로 진행된 '박문호 자연과학세상'의 '특별한 뇌과학' 강의 과정을 마쳤습니다. 발생학과 면역학이라는 다소 어려운 주제로 4주를 보냈습니다. 강의실 내에서는 '와우! 그랬단 말이야!"정도의 새로운 공부에 놀라기도 하지만 강의가 끝나고 나오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다시 세팅되는 희한한 경험을 한 달 동안 했습니다. 뭐 이번만 그런 것은 아니고 벌써 햇수로 13년째 되고 있습니다. 봄가을로 진행하는 오프라인 강의에 매년 참여해 공부하고 있지만 머릿속에 남은 것은 솔직히 고백컨데 거의 없습니다. "그동안 그 오랜 시간 공부했다고 하는데 뭐 한 거냐?"라고 핀잔을 줘도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게으른 탓이겠지요. 그렇게 박문호 박사가 "의미를 따지지 말고 외우라"라고 했음에도 "시간이 없네" "굳이 뭐 내가 TCA 사이클 단계를 외워야 돼?" "보웬도표를 외운다고 뭐가 달라지는데?"라는 천박한 핑계로 소 먼 산 바라보듯 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나마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13년째 공부하고 있으니 들은풍월은 있어, 들으면 그런가 보다 정도 할 수 있는 수준은 됩니다. 그렇다고 그게 뭐냐고 다그치면 그 또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한계가 있음을 자인합니다. 헛공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보면 한심할 정도입니다. 지적 유희도 아니고 지적 허영과 지적 허세만 가득했음을 고해성사합니다.


에고 뭐 연말 약속 및 모임에 대한 글을 이어가다 보니 자아비판하는 글이 되어버렸군요 ㅠㅠ


어제 '특별한 뇌과학'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자리에 앉아 강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같이 강의를 듣는 수강생 한 분께서 다가오시더니 불쑥 책을 한 권 내밉니다. 제가 2021년 9월에 출간했던 '나는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고 살았다'라는 에세이 책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책을 낸 지가 벌써 4년 가까이 되기도 했고 책을 사서 들고 오신 분은 저와 눈인사 한번 한 기억도 없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책을 내미시면서 "책 읽고 공감하는바 많았고 삶을 생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사인 부탁합니다"라고 하십니다. 종이책을 출간한 직후에는 여러권에 사인을 했지만 이렇게 4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는데 책에 사인을 해달라는 경우는 처음이기에 다소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5시간의 강의를 듣는 동안, 계속 머릿속에 그분의 존재가 떠나질 않았습니다. "나를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알고 어떻게 책을 샀고 어떻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걸 알았을까?" 궁금증에 호기심이 더해집니다. 그래서 강의 3시간이 끝나는 중간 인터미션 시간에 '박자세' 단체를 운영하시는 이사님께 그분의 존재에 대해 여쭤봤습니다. 이름은 책에 사인을 할 때 물어봐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원에서 피부과를 하시는 의사 선생님이세요"라고 존재를 알려주십니다. '박문호의 자연과학세상'과 인연을 맺은 지는 4년 정도 되신답니다.


그제야 그분께서 이곳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저를 알게 됐고 우연히 책을 쓴 것을 보고 고맙게도 온라인 구입을 하셨을 것임을 눈치채게 됩니다. 매주 목요일 저녁에 3시간 동안 zoom으로 하는 온라인 강의도 함께 듣고 봄가을 진행되는 '137억년 우주의 진화'와 '특별한 뇌과학'공부를 같이 했겠지만 다들 공부하느라 멤버들과 인사하고 소개하는 자리가 없긴 했습니다. 수강생 숫자가 50-70명 정도 되니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 제 책을 사서 직접 찾아주신 그 고마움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배가됨을 인지하게 됩니다.


인연의 감정은 참으로 그러합니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상황을 세렌디피트처럼 만나게 되면 가벼운 흥분과 기분 좋음이 밀려옵니다.


그런 한편으로는 책과 글에 대한 엄중함도 다시 한번 무겁게 다가옵니다. 책과 글은 서판에 각인된 증거입니다.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은 오로지 독자들의 눈과 생각 속에서만 다시 기능을 합니다. 서가에 꽂혀 먼지를 쓰고 있을 수도 있지만 어느 누군가에 끌려 다시 먼지 털고 세상의 빛을 볼 때도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문자가 되살아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이어가는데 소홀히 할 수 없음을 말입니다.


책과 글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일깨워주신 독자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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