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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지르고 수습한다

by Lohengrin

세상사는 일은 결국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 존재의 실존적 근거 중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선택'이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관찰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순간 무한한 가능성의 파동이 하나의 입자로 고정되듯, 우리의 인생 또한 선택이라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구체적인 현실로 결정된다. 선택은 무한의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트리거(Trigger)다.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택이 곧 그 사람의 운명이다.


우리는 매 순간 갈림길에 선다. 기로에 서면 필연적으로 망설임이 찾아온다. 이것을 고르면 저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기회비용에 대한 공포, 즉 '손실 회피 편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흔히 '결정 장애'라고 부르는 현상은 단순히 우유부단한 성격 탓이 아니다. 그것은 최적의 해를 찾으려는 뇌의 과부하 상태이자, 실패를 두려워하는 생존 본능의 발현이다.

가장 흔한 예로 직장 동료들과의 점심 식사 시간을 떠올려보자. "무엇을 먹을까?"라는 단순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망설인다. 혼자라면 내 입맛에 맞는 것을 고르면 그만이다. 하지만 '타인'이라는 변수가 개입되는 순간, 선택의 알고리즘은 복잡해진다. 각자 다른 메뉴를 시켰을 때 조리 시간이 달라 발생하는 시차, 그로 인해 끊기는 대화의 맥락, 타인의 식사 속도를 맞춰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이 모든 시뮬레이션이 무의식 중에 돌아간다. 결국, 누군가 "나는 짜장면"이라고 외치면, 복잡한 연산 과정을 생략하고 싶은 뇌는 안도하며 "나도 짜장면"을 외친다. 이른바 '동조 효과'다. 물론 맛집의 다양성과 개인 취향의 존중으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우리는 집단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안전한 선택, 즉 묻어가는 선택을 하곤 한다.


메뉴 선택의 망설임은 가벼운 일상사지만, 인생의 중대한 결정 앞에서의 망설임은 그 무게가 다르다. 익숙하게 체화되어 무의식적으로 처리하는 '패스트 싱킹(Fast Thinking)' 영역 외에, 숙고가 필요한 모든 선택에는 생존 본능이 강력하게 제동을 건다.


망설임의 본질은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다. 둘 중 하나를 선택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하나를 버렸다는 뜻이다.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그리고 선택한 길에서 마주칠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뇌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뇌는 예측 오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예측되지 않는 미래는 곧 생존의 위협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 불안한 심리를 파고드는 것이 바로 점쟁이나 사기꾼들이다. 그들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확정적인 그림을 제시한다. 내가 망설이며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을 때, 누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미래를 시뮬레이션해 주면 뇌는 그 편안함에 기대고 싶어 진다. 수많은 우연의 확률 중 하나일 뿐이지만, 누군가 "그렇게 된다"라고 단정 짓는 순간, 우리는 확증 편향에 빠져 그 미래를 믿어버린다. 확신은 행동을 추동하는 강력한 부스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의 확신에 기댄 선택은 내 것이 아니다. 선택의 망설임을 최소화하고 주체적인 결정을 내리는 유일하고도 과학적인 방법은 '경험의 총량'을 늘리는 것이다. 온갖 변수들을 직접 경험하여 뇌 속에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 한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과거의 데이터와 대조하여 다음 단계의 전개를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직관이다. 경험은 막연한 불안을 계산 가능한 리스크로 바꿔준다.


우리는 흔히 선택을 '짜장이냐 짬뽕이냐', '도전이냐 안정이냐'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 즉 양자택일의 문제로 착각한다. 하나를 고르기 위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선택의 메커니즘을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항상 간과하고 있는 '제3의 길'이 존재한다. 제3의 길은 단순히 A와 B의 절충안이나 기계적인 중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판에서 말하는 캐스팅보트나 이념적 중도를 넘어, 문제의 차원을 달리하는 창조적 해법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보자. 비행기 객실 온도는 대략 22~24도로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러나 승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춥다며 담요를 찾고, 누군가는 덥다며 부채질을 한다. 이때 선택지는 '온도를 올린다'와 '온도를 내린다'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 온도를 조절하는 대신 개별 송풍구를 조절하게 하거나, 혹은 온도 조절 시스템을 미세하게 껐다 켰다를 반복하여 유동적인 평형 상태를 만드는 방법도 있다. 이것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상태가 아니라, 더우면서도 시원한 상태를 만들어내는 제3의 제어 방식이다.

이처럼 제3의 길은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가치를 통합하거나, 아예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할 때 열린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가 아니라,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가능성의 중첩 상태'를 인정하는 유연함에서 나온다.


결국 제3의 선택지를 발견하는 안목은 어디서 오는가? 다시 원점이다. 그것은 수많은 시도와 실패, 즉 경험 속에서 나온다. 책상머리에서 하는 고민만으로는 양자택일의 딜레마를 벗어날 수 없다. 직접 부딪혀보고 깨져보는 과정에서 뇌의 시냅스는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내고, 그 경로들이 모여 남들이 보지 못하는 제3의 길을 포착하는 통찰력이 생긴다.


인생, 복잡하게 시뮬레이션 돌려봐야 알 수 없는 변수 투성이다. 때로는 뇌과학적 분석도, 철학적 사유도 접어두고 단순한 명제가 정답일 때가 있다. "인생 별거 없다. 그냥 하면 된다."


우리가 하는 모든 '그냥 하는 행동' 자체가 사실은 우주를 향해 던지는 가장 강력한 선택이다. 망설임의 시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일단 저지르면 수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배우고 성장하며,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제3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완벽한 선택을 하려 애쓰지 말고, 선택한 후에 그 결과를 완벽하게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불확실한 세상을 건너는 가장 과학적이고도 현명한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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