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마지막 날에

by Lohengrin

2025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뜬 태양이 어제와 다르지 않고 또 내일과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그럼에도 대나무 마디처럼 묶고 정리를 해놓아야 다음 마디를 키울 수 있다는 기약을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위가 365일을 주기로 찾아옵니다만 그 마디 하나 정리하는 게 쉽지 않음을 매번 느낍니다.


그래서 인간이고 사람일 겁니다.


매번 완벽한 한 해를 살았다고 자부하면 그것은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저 잘 살았다고 최면을 걸고, 큰 사고와 대오 없이 잘 버텨서 무사히 한 해의 마지막에 서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했다고 자위하면 족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으로 한 해를 돌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돌아보면 계획했던 것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는 것 같은 게 인생이고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숨을 쉬어 세상의 공기를 흡입해 에너지를 태우고 생각을 하고 올 한 해를 되돌아볼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경이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더 바라고 무엇을 더 추구할까요? 물론 후회와 반성이 없으면 더 나은 내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하지 못하면 그저 그런 삶을 살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책상 위에는 어제 먹고 남은 사과 속 뼈대가 놓여 있습니다. 정확히 어제저녁 6시 반 식사를 하고 7시쯤 후식으로 먹은 사과 한 개의 잔해입니다. 사과를 씻어서 껍질채 우적우적 베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사과 속만 덩그러니 남았는데, 랩탑 작업을 하느라 다 먹은 사과 잔해를 책상 위에 그대로 놓고 1시간 여가 지났을 때 우연히 쳐다봤습니다. 약간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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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아시겠지만 보통 사과는 깎거나 베어 물고 나면 금방 갈변되어 색깔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갈변 현상은 사과 내의 폴리페놀 화합물이 공기 중의 산소와 만나 산화효소에 의해 갈색 색소인 멜라닌을 생성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제저녁 먹은 사과는 갈변현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과 잔해를 버리지 않고 책상 옆에 그대로 놓아두고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2시간 더 지났음에도 갈변현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밤새 놔둬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12시간이 넘게 지나 다시 봤는데 역시 갈변현상은 크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밤새 수분이 증발하여 조금 마른 듯 하지만 갈색의 상흔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어제저녁 후식으로 먹은 사과는 시나노골드라는 품종입니다. 황금사과라고 이름 붙여진 노란색 사과입니다. 일본에서 품종 개량된 것인데 국내에서도 많이 재배되고 있습니다. 갈변 속도가 늦은 장점 때문에 과일 샐러드나 컵 과일을 파는 상점에서 아주 애용되는 사과이기도 합니다. 사과를 썰어서 담아놓았을 때 금방 갈변되면 보기에도 안 좋을뿐더러 식감도 변합니다. 그런데 이 시나노골드 품종의 사과는 이 단점을 최대한 지연시킬 수 있습니다. 미리 깎거나 잘라놓아도 하루 정도까지 갈변되지 않기에 식재료 효율성 면에서 최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갈변 속도가 늦도록 품종 개량이 된 거라, 먹으면 건강에 문제가 생길 텐데"라는 염려가 있다면 붙들어 매셔도 됩니다. 지금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음식 재료들은 모두 품종 개량이 된 것입니다. 유전자 조작이나 변형이라는 용어 때문에 막연한 갖게 된 불안과 공포일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쌀이 그렇고 소가 그렇고 돼지가 그렇고 모두 품종 개량된 것입니다. 품종개량되지 않은 자연식품은 눈을 씻고 찾을래도 찾기 힘들뿐더러 그렇게 하다간 굶어 죽기 딱 좋습니다. 내가 심고 내가 키우면 자연산인 줄 압니다. 무지의 소산이자 착각일 뿐입니다. 시나노골드 사과는 갈변 촉진 효소의 양을 줄여 산화 반응이 늦도록 품종 개량이 됐을 뿐입니다.


2025년 한 해를 정리하면서 이토록 사과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과육을 다 베어 먹고 남은 사과의 잔해에서 2025년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사과처럼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이빨자국 남듯이 갈색으로 변한 사과의 뼈대였다면 바로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을 겁니다.


자신의 본형을 잃지 않고 유지하고 있기에 눈에 뜨였고 그래서 하루 저녁을 지켜보게 되는 일을 만들었습니다. 늦출 수 있다는 것. 유지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건강한 생명의 핵심입니다.


갈변되지 않는 사과의 잔해처럼, 지금 이 날, 이 시간, 나의 존재를 알고 있고 깨닫고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올 한 해도 잘 살았고 잘 버티고 잘 견뎌왔습니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면 됩니다. 오늘은 그런 날입니다. 칼로 물 베듯 흔적조차 치유되는 날입니다. 송구영신의 날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으로 화양연화의 한 해를 보낸 것에 대해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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