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에서 자주 보는, 포유류의 어린 새끼들이 벌이는 천진난만한 '놀이'는 결코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훗날 마주할 냉혹한 생존의 현장을 미리 살아보는 처절한 리허설이다. 개과나 고양잇과 같은 포식자들의 새끼를 보면, 서로 엉겨 붙어 물고 뜯고, 쫓고 쫓기는 그들의 행위는 근육의 기능을 폭발적으로 향상시키고, DNA에 각인된 사냥 본능을 깨우는 과정이다. 이 시기의 놀이가 결여된 개체는 무리에서 도태되거나 사냥터에서 포식자로서의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인간 역시 이 생물학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류의 조상들에게 무리로부터의 이탈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인간의 뇌는 집단에서 소외될 때 느끼는 감정을 신체적인 통증과 동일한 영역에서 처리한다. 우리가 타인의 눈치를 보고 무리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수만 년간 이어져 온 생존 본능의 발현이다. 이것이 바로 '동료 압력(Peer Pressure)'의 뿌리다.
이러한 동료 압력은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는 청소년기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성세대의 눈에는 이해하기 힘든 유행의 대물림도 이 관점에서는 명확해진다. 삼성전자에는 미안한 일이지만, 요즘 청소년들에게 갤럭시폰은 '꼰대폰'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성능의 우열을 떠나 아이폰을 손에 쥐지 못하는 순간, 그들은 또래 집단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밀려날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한때 전국의 교실을 검은색 물결로 뒤덮었던 롱패딩 유행이나, 최근 가방마다 인형 뽑기 기계에서 득템한 인형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나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이는 개성의 표출이라기보다 "나도 당신들과 같은 부류입니다"라는 무언의 신호이자, 집단 내에서 튀지 않고 안도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방어기제다. 그들에게 유행은 패션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보호색이다.
동료 압력은 청소년기의 철없는 모방 심리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전쟁터가 대표적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지는 포화 속에서 군인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거창한 충성심이나 개인의 생존 본능이 아니다. 바로 옆에서 피를 흘리는 동료에 대한 강렬한 책임감, 즉 '전우애'라는 이름의 동료 압력이다.
지휘관이 '돌격 앞으로'를 외쳐도 병사들은 빗발치는 총알 앞에서 공포에 질려 엎드려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공포가 분노와 책임감으로 치환되는 임계점이 있다. 바로 옆의 동료가 쓰러지는 순간이다. 나를 믿고 의지하는 동료를 두고 나 혼자 살겠다고 엎드려 있을 수 없다는 심리적 압박, 그 숭고한 동료 압력이 인간을 죽음의 공포 너머로 뛰어들게 만든다. 이처럼 동료 압력은 조직을 지탱하고 기적을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끈이 된다.
동료 압력의 본질이 '환경에 대한 동질화'라면,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떤 환경에 나를 노출하고 있는가?" 좋은 집단에 소속된다는 것은 단순히 인맥을 넓히는 일이 아니다. 그 집단이 뿜어내는 '양질의 압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일이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증오를 생산하는 정치 커뮤니티에 머문다면, 당신의 뇌는 세상을 온통 적과 아군으로만 나누는 편협한 회로로 고착될 것이다. 반면, 끊임없이 공부하고 성찰하며 지식을 공유하는 모임에 있다면, 당신의 세상은 지적 탐구와 상상력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을 갈망하는 이유는 그곳의 시스템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압력의 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집단 지성이 작동하는 곳에서는 나의 게으름조차 긍정적인 자극에 의해 열정으로 치환된다.
결국 인생은 어떤 양질의 커뮤니티에 진입하느냐의 싸움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냉혹한 진실이 있다. 양질의 커뮤니티는 결코 '공짜'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군집 사회는 냉정하다.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무언가, 즉 상호 호혜적인 가치가 확인될 때 비로소 그 무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나의 달란트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지식이든, 기술이든, 혹은 타인을 배려하는 인품이든 내가 가진 콘텐츠를 증명하고 공유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얻기만 하려는 존재를 환영하는 고차원적인 커뮤니티는 없다. 내가 먼저 공부하고, 내가 먼저 찾아 나서며, 내가 먼저 나의 가치를 드러내야 한다.
세상은 나를 먼저 불러주지 않는다. 내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며 그 문을 두드릴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긍정적인 동료 압력의 품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며, 그 환경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획득한 '자격증'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오늘, 어떤 압력 속에서 나의 삶을 벼려내고 있는가. 나태함을 경계하고 신독의 묵상을 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