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교체됨에 따라 우리 삶을 지탱하던 언어들도 새로 태어나고 소멸한다. 이는 단순히 단어의 변화가 아니라, 집단지성의 힘으로 지구 최상위 포식자가 된 인간 사회가 겪는 진화의 한 과정이다.
흔히 진화라고 하면 더 나은 방향, 더 고등한 단계로의 발전을 떠올리기 쉽지만, 엄밀히 말해 생물학적 진화에는 정해진 '옳은 방향'이 없다. 오로지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만약 외부 환경이 극도로 기형화 되어 두 눈을 가진 것보다 한 눈으로 사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면, 스스로 한쪽 눈을 찌르는 잔인한 선택을 해서라도 적응하는 것이 진화의 냉혹한 논리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효율과 개인의 편익이라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는 공동체라는 소중한 '한쪽 눈'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이 기형적인 '외눈박이 진화'가 인류 생존의 근간인 가족 공동체를 서서히 허물어트리고 있다.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인 가족의 붕괴를 상징하는 가장 뼈아픈 징후는 바로 '소리의 부재'다. 마지막으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자. 나조차도 10년은 족히 넘은 듯하다. 그 기억조차 동네 골목이 아닌, 퇴근길 붐비는 전철 안에서 우연히 마주친 소음 섞인 기억일 뿐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자녀를 결혼시킨 지인들의 소식을 들어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혼인 소식은 들려오되,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기쁨의 전화는 전혀 없다. 간혹 손주를 본다는 친구들이 모임에서 사진과 동영상을 내밀며 소위 '자랑질'을 하는 광경을 본다. "손주 자랑은 돈 내고 하라"는 농담이 불문율처럼 퍼질 만큼 대화의 희귀한 소재가 되었다.
과거에는 당연했던 손주 자랑이 왜 이토록 유난스러운 과시가 되었을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는 서글픈 진실이 숨어 있다. 이제 새로운 생명을 마주하는 일은 보편적인 축복이 아니라,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소유한 일종의 '희귀한 성취'가 되어버린 것이다. 유전자를 이었다는 본능적 기쁨보다, 공동체 멸절의 위기 속에서 나만은 살아남았다는 과시욕이 섞여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처럼 아이 보기 힘든 세상에, 그 정도의 꼰대질은 차라리 너그럽게 용인해줘야 할 만큼 우리 사회의 미래는 척박해졌다.
아이 울음소리가 사라진 사회에서 희망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구성원이 줄어들면 공용 시설과 사회 인프라를 유지할 동력이 상실된다.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지방의 빈집들이 흉물스럽게 방치되듯 우리 사회 전체가 걷잡을 수 없이 황폐해질 것이다.
이러한 붕괴는 집 밖의 문제만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지만, 우리는 과연 '식구(食口)'인가. 식구란 모름지기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이다. 한 달에 90번의 식사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마주 앉아 온기를 나누는 횟수가 열 번도 채 되지 않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제 가족과 식사 한 끼를 하려면 직장 상사와 약속을 잡듯 날짜와 시간을 치밀하게 맞추어야 한다.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으니 대화가 단절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디바이스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지만, 바로 옆방에 있는 가족과는 담을 쌓고 산다. 심지어 많은 이들이 이러한 '따로국밥' 식의 삶이 편하다고 항변한다. 잠자리를 따로 쓰고 동선을 겹치지 않게 조절하는 것이 간섭 없는 자유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진화가 아니라, 공동체의 해체이며 인간 소외의 극치다.
가족은 단순히 편의에 의해 모인 기능적 집단이 아니다. 비록 시대가 변해 각자의 역할과 생활 패턴이 파편화되었을지라도, 가족이라면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최소한의 '성역'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족 유대의 시간'을 의도적으로, 어쩌면 억지로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식사 시간을 맞추는 작은 노력부터, 오늘 하루 어떤 감정의 파고를 겪었는지 나누는 소소한 대화의 장이 필요하다. 공동체에는 반드시 중심을 잡고 조율하는 이가 있어야 하며, 가정에서는 가장이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권위적인 가장이 아니라, 흩어진 마음들을 모으고 화목의 온도를 조절하는 '조율사'로서의 가장 말이다.
집은 단순히 잠을 자고 나가는 정거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풍파에서 돌아와 상처를 치유하는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한 집안의 분위기가 화목하고 유대가 단단할 때, 비로소 그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나가 어두운 사회를 밝힐 수 있다.
생존을 위해 한쪽 눈을 찌르는 외눈박이의 삶은 당장은 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입체감을 잃어버린 시선으로는 삶의 진정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은 구태의연한 도덕 교과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종(種)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생존 전략이다.
오늘 저녁, 텅 빈 식탁에 온기를 채우는 일부터 시작하자. 사라진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다시 이 땅으로 불러오는 길은, 우리 집 거실에서부터 시작되는 가족 간의 대화와 유대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