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퇴직하기 전에 다니던 회사의 가까운 사람들이 모인 카톡방에 흥미 있는 대화 주제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부부간에 투닥거리며 언쟁하는 경우가 있는데 '싸우지 않는 단어'들을 모아봤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짐작건대 아마 전날 사모님과 말다툼을 한 듯했고 아침까지도 말싸움의 감정이 잔상으로 남아있어서 그런 듯했습니다. ㅎㅎ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지만 말다툼 이후의 감정은 추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 흐지부지 잊고 살겠지만 말입니다.
카톡방에 있는 다른 분께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뜻대로 하소서'를 추천합니다. 배우자와의 말다툼을 끝내고 감정을 상하지 않는 현명한 선택이지 싶습니다. 이 이야기를 꺼냈던 분께서 gemini에게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아무 생각 없이 상대의 자존심을 짓밟는 5초의 광기를 5분의 성찰을 바꾸어 주는 힘은 멈춤이고 침묵"이라고 답을 내놓더랍니다. AI가 부부간의 언쟁에 해법을 제시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심리상담 카운슬러가 필요 없는 시대인 듯합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정답보다 더 중요한 본질은 결국 '감정'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타인과 타인이 만나 부부라는 이름으로 50년, 60년을 함께 삽니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조차 사소한 일로 다투거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충돌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당연한 갈등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금기'로 치부하며, 싸움이 일어나는 순간 스스로를 패배자나 불행한 사람으로 낙인찍곤 합니다.
부부간의 말다툼은 '받아들임'의 결핍에서 시작됩니다. '뜻대로 하소서'라는 말이 최고의 방어 기제인 이유는, 그것이 논리적 항복이 아니라 상대의 존재와 입장을 온전히 인정하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경계심을 늦추지만, 동시에 상대가 내 기대에 어긋날 때 더 강하게 반응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소위 '가까운 사람에게 더 화를 내는' 이유는 뇌가 그만큼 상대를 나의 일부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년퇴직 후 집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갈등의 밀도는 높아집니다. "남자는 해 뜨면 집을 나가고 해 지면 돌아와야 한다"라는 선배들의 조언은 단순한 농담이 아닌 듯합니다. 그것은 물리적 거리를 통해 서로의 감정적 안전지대를 확보하라는 생존 전략입니다.
나 역시 퇴직 후 1년 남짓 이른바 '화양연화'의 자유를 만끽하며 지내왔지만, 최근 들어 그 조언이 슬슬 현실로 다가옵니다. "이제 밖으로 나가 돈이라도 벌어와야 하나?"라는 눈치를 보게 되는 시점, 만약 그때 배우자가 "그동안 잘 놀았으니 이제 나가서 돈 좀 벌어오지"라고 툭 던진다면 어떨까요. 아마 자존심이라는 뇌의 방어 기제가 즉각 발동하여 분노라는 불꽃을 피워 올릴 겁니다.
배우자의 감정 상태를 읽는 일은 평생의 과업입니다. 뇌는 타인의 감정을 읽기 위해 '거울 뉴런'을 사용하지만, 익숙함이라는 함정에 빠지면 이 안테나는 무뎌지기 마련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툭 내뱉는 말들이 비수가 되어 돌아오는 이유는 우리가 배우자를 '모든 걸 다 아는 사람' 혹은 '언제나 내 편이어야만 하는 존재'로 박제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정의 심연은 깊고도 오묘합니다. 콩깍지가 벗겨지고 원수가 되는 부부들의 이야기가 TV를 가득 채우는 이유는 그 깊이를 탐험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결국, 현명한 처신은 배우자가 변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유연해지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일거수일투족에 내 감정을 맡기는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5초의 광기가 찾아올 때 기꺼이 '침묵'이라는 버튼을 누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인생이라는 길지 않은 여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풍파를 만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무시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가장 정중하게 대우해야 할 손님임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부부라는 이름의 진정한 화해가 시작될 것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길, 배우자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작은 단어들을 주머니 속에 챙겨 넣고 무탈하게 건너가야겠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저녁밥을 해놓고 퇴근하는 배우자를 맞이해 봐야겠습니다. 남은 인생 편안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너무 찌질한가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는 갈대로 사는 길이 편안한 노후를 보장할 테니까요. 참고 버티고 견뎌내 보시지요. 그래도 혼자 가는 것보다 같이 가는 사람이 있는 게 훨씬 좋다는 것은 다 알고 있잖아요. 더 이상 못 참겠다고요?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