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반성과 투정

by Lohengrin

매일 아침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세월이 20년도 넘지만, 생각의 흔적을 공개하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 팬데믹이 창궐하던 2020년 초반이다. 사람들과 대면하지 못하고 거리를 두고 갇혀 살기 시작한 때, 대화의 창구이자 소통의 문으로 들어갔던 게, daum의 '브런치 스토리'를 글 쓰는 도구로 활용하는 거였다. 지금 이 글도 브런치 스토리를 통해 세상으로 빼꼼히 나의 생각을 전할 것이다. 이렇게 브런치 스토리에 올린 글의 숫자가 벌써 1,248개다. 세월로 치면 5년 정도의 시간이니 숫자로 보면 그래도 제법 많은 글들을 공개한 셈이다. 덕분에 종이책 '나는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고 살았다' 에세이를 출간했고 '정년퇴직 백서- 우아하게 마주하기'와 '과학으로 푸는 일상의 질문들'이라는 e-book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올리면서부터 그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글을 쓰면서 '읽는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한다는 것이다. 나를 위한 글이라기보다는 남을 위한 글을 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감 비슷한 느낌이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글이라는 것이 의미를 전하는 뉘앙스의 차이이기에 글에서 선택되는 단어에도 차이가 있게 된다.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공개의 대상이 되면, 글에 담기게 될 감정을 조절해야 하고 단어 선택에도 신중하게 된다. 같은 문장도 단어에 따라서 전달되는 의미가 달라지는 해석의 영역이 되기에 그렇고, 내 손을 떠난 글들은 오롯이 '읽는 사람'의 생각으로 재해석되기에 더욱 그렇다.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하는데 이 조심스러움이 글의 진도와 속도를 붙잡고 만다. 더구나 글은 말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서판에 새긴 명문으로 남는다. 팩트가 잘못되었거나 오탈자가 있거나 증오와 기쁨의 감정조차 그대로 각인된다. 글이 말보다 엄중해야 하는 이유다.


글은 즉흥적일 수가 없다. 즉흥적으로 쓴다고 해도 다시 읽고 수정되고 정정되고 교정되는 게 글이다. 말이 청각 작용이라면 글은 시각작용인데 오감이 멀티모달로 작동되어야 글이라는 문장을 만들어낸다.


매일 아침 하얀 빈 화면을 마주하면 첫 번째 드는 고민이 무얼 쓸 것이냐에 대한 소재의 고민이다. 사실 무엇을 쓸 것인지 소재 고민을 하는 순간, 글이 안 써진다. 아니 쓸 수가 없다.


당연하다. 소재와 주제가 정해져야 글을 써 내려갈 텐데, 방향조차 정하지 못했는데 어찌 글이라는 것을 쓸 수 있겠는가 말이다. 글을 써야 할 때 제일 난감한 순간이다. 일기 쓰듯 미주알고주알 혼자만의 독백으로 글을 쓸 수도 있지만, 지금 글은 만인에게 공개되는 글이 아니던가. 글의 품격을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공개되는 글쓰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글의 품격은 글의 소재보다는 글에 담기는 언어의 표현형에 있다. 즉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의 품격이다. '대통령의 글쓰기'를 쓴 강원국 작가의 경우, 글에 쓰고자 하는 단어 하나를 놓고도 사전을 찾아 비슷하거나 같은 뜻의 단어들을 모두 검색한 후에 가장 뜻과 의미를 전달하기에 적합하고 예쁜 단어를 골라 적는다고 한다. 그 정도가 되어야 글을 쓴다고 할 수 있다. 유시민 작가가 한 촌철살인의 문장도 내 가슴에 박혀 있는 것이 있다. "많이 읽고도 글 못쓰는 사람이 있지만, 많이 읽지 않고 글 잘 쓰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글 쓰는 사람은 풍부한 표현을 담을 수 있는 많은 어휘를 알고 있는 것이 필수다. 이 필요조건을 충족시키는 방법은 오로시 타인의 글을 읽는 방법밖에 없다. 글을 쓰는 데 있어 철칙이다.


단어를 모르면 생각을 할 수 없다.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단어이기에 그렇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알려면 이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를 알아야 한다. 단어를 모르기에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고, 한 문장 이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글을 못쓰고 말을 못 한다는 것은 그만큼 알고 있는 단어가 부족하다는 뜻이나 진배없다.


이 아침 글 쓰는 속도가 나지 않고 횡설수설하는 이유도 생각을 오로지 표현해 내는 어휘가 부족한 까닭이다.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글은 머릿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외과수술의 문학적 결과물이다. 수술을 잘하기 위해서는 수술도구가 필요하듯, 글 쓰는 도구를 갈고닦아야 한다. 명문의 책들을 읽고 명 문장가들은 그때 그 상황을 어떻게 묘사하고 어떤 단어를 선택했는지 명경으로 삼을 일이다. 책 몇 권 읽는다고 하루아침에 축적될 능력이 아님을 안다. 평생을 곁에 두고 읽고 공부해야 한다. 아침 글이 안 써져서 부리는 투정이자 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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