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너무 잘 만들어 망한 기업

by Lohengrin

혹시 집에서 사용하는 물건 중에 적어도 20년 이상 쓰고 있는 것이 있을까요? 물론 아직도 작동하고,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골동품'적 가치로 진열대 위에 올라가 있는 도자기나 거실 분위기보다는 투자 목적으로 벽에 걸어놓은 유명화가의 그림, 서가에 꽂혀있는 책과 족보 같은 것은 제외합니다.


이 정도 전제조건만 붙이고 집안을 둘러보면, 그런 물건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아마 살면서 이사를 서너 번을 했을 테고 이 이사과정에서 사용연한이 좀 된 오래된 제품들은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 가차 없이 새것과 교체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새로 이사 가는 세련된 집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일상에서 매일 사용하는 물건인데 10년 20년 넘게 써도 아직도 사용가능하다는 것은 제품이 망가지지 않게 잘 만들어졌거나 부품을 교체하면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모듈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품을 너무 튼튼하게 잘 만들면, 물건 만든 기업이 '품질의 역설'에 빠져 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조기업들이 일부러 제품 수명을 조절하는 '계획적 구식화(Planned Obsolescence)' 전략을 씁니다. 지금 손에 들려 있는 휴대폰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휴대폰 제조사들은 매년 기능만 몇 가지 추가해서 새로운 모델이라고 내놓습니다. 통화기능보다는 동영상 콘텐츠 등 데이터 처리량이 급속도로 늘어가는 것을 수용하려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교체 사이클을 높여 생산 회전율을 유지하고 수익 극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교체 사이클이 짧은 대신,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여 불만을 상쇄시키는 마케팅 방법입니다.


물건을 너무 튼튼하게 잘 만들어 기업이 망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여럿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 중에, 싱거(Singer) 재봉틀이 있습니다. '대를 이어 쓰는 골동품'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을 정도입니다. 1851년 미국 뉴욕에서 발명된 싱거 손틀 재봉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재봉기 브랜드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0년에 서울에 들어와 정동길에 자리를 잡았던 사옥이 아직도 남아있어, 정동길 구 신아일보사 별관건물 앞에 역사표지 안내판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기도 한데, 우리나라 근현대 생활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생활필수품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이 싱거 재봉틀이 디지털 미싱으로 거듭나서 여전히 세계 재봉기 명품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만, 초기 제품들은 무쇠로 제작된 본체가 수십 년이 지나도 망가지지 않았고 어머니가 쓰던 제품을 딸이 물려받아 사용하는 상황이 반복되어 신제품 수요가 급격히 줄었습니다. 싱거는 판매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할부 판매 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하며 버텼으나 시장 포화와 오래 사용되는 내구성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20세 후반에 경영권이 수차례 넘어가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또한 컴퓨터의 등장으로 사라진 문명의 이기중에 타자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80년대 초, 386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문서를 만드는데 타자기의 역할은 지대했습니다. 기업마다 타자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타자수가 있을 정도였고 여직원들은 타자를 얼마나 빨리 칠 수 있는지가 입사조건이었습니다. 타자기 중에 독일 올림피아사에서 만든 제품은 완벽주의에 가까운 설계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1950-60년대 생산된 모델들은 정밀한 기계 공학의 결정체로, '타자기계의 메스세데스 벤츠'라고 불리며 압도적인 내구성을 자랑했습니다. 한번 사면 수리할 필요조차 거의 없었기에 교체 수요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컴퓨터라는 새로운 대체품이 나오는 시대적 변환기이기도 했지만 '죽지 않는 올림피아 타자기'로 인하여 회사는 1990년대 초반에 생산 라인을 접어야 했습니다.


전환된 시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사라진 휴대폰의 명성 노키아와 카메라 필름의 전설인 코닥과 후지 필름이 사라진 것과, 튼튼한 내구성으로 인하여 제품은 남아있지만 회사가 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런 ㅠㅠ 집안에 20년 이상 사용하고 있는 제품이 있는지 물어놓고 옆길로 샜습니다. 다시 원래 길로 돌아옵니다.


저희 집에서 당장 눈에 띄는 오래된 물건 중에 아직도 작동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두 개 있습니다. 거실벽에 걸린 뻐꾸기시계와 지금 책상 위에 놓인 '워터맨' 만년필입니다.


뻐꾸기시계는, 중학교 때인가 아버님께서 사 오신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45년이 넘은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시곗바늘이 작동을 해서 거실의 시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세월 동안 이사를 세 번 다녔고 아버지에서 저에게로 세대가 바뀌었음에도, 버리지 못하고 데리고 다녔네요. 거실의 분위기에 맞지 않은 장식품 같은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시간은 틀리지 않고 잘 가르쳐주니 내치기가 쉽지 않았던 듯합니다. 뻐꾸기시계임에도 뻐꾸기가 세월이 지나 늙어서 그런지, 나와서 시간을 알려주지는 못합니다. 1.5V D형 건전지만 갈아주면 거의 2년 정도는 굿굿이 시간의 흐름을 숫자로 옮겨놓습니다. 대단한 기계 수명이자 단순한 공학의 무한순환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또 하나인 '워터맨' 만년필은 2001년에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니, 이것도 25년을 채우고 있습니다. 펜촉이 닳아 글씨가 조금 굵게 써지는 느낌이 있지만 아직도 잘 써지고 있습니다. 제가 최애로 사용하는 필기도구입니다. 만년필로 쓸데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도 돼서 오래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연필이나 볼펜 같은 경우는 쓸 때 손가락에 약간의 힘이 들어갑니다. 작은 차이지만 1시간 넘게 필기를 해야 하는 경우는 에너지 소비 총량에 큰 차이가 납니다.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적당히 고장 나는 제품'을 만듭니다. 스마트폰 배터리 일체형 설계나 가전제품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중단과 같은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계획적 구식화 전략이 소비자 권리를 침해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기업 생존을 위한 필수 선택일까요? 과거에는 기업의 일방적인 전략이 숨어 있었다면 지금은 지속가능한 소비와 기업의 이익 사이에서 법적인 규제와 기술적 대안이 마련되고 있는 과도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환 경제' 모델이라고 합니다.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용 경험'을 파는 구독 서비스로의 전환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조명 기구를 파는 대신 '빛'을 구독하게 하고, 전구 교체 및 관리는 기업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업은 제품을 오래 쓸 수 있게 만들수록 이득이 됩니다. 워터맨이 만년필을 팔면서 잉크를 같이 파는 것과 같습니다.


잊히지 않는 명품의 명성은 그렇게 지속가능한 순환 구조속에서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을 때, 유지할 수 있는 명예입니다. 그런데 60년 넘게 쓰고 있는 이 몸뚱이는 왜 명품이 안될까요? 이젠 내구성도 떨어져 슬슬 고장 나는 부품도 여럿 있고 말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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