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동네에 있는 대형양판점인 코스트코에 가까운 친구가 물건 사러 온다고 전화가 왔길래, 겸사겸사 따라 나섰다. 집에서는 대량으로 구매해 쓸 물건이 거의 없는지라 코스트코에 가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연회비내고 회원가입도 하고 카드도 있어야 한다는데 나는 없다. 마침 가게를 하는 친구가 재료준비할 것이 있어 우리 동네로 온다고 하기에 궁금증 반, 호기심 반으로 따라갔던 것이다. 할일없는 백수의 오지랖이다.
나는 뭐 필요한 물건이나 음식재료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저 슬렁슬렁 친구 뒤를 따라 구경을 다니며, 간혹 식품을 파는 코너나 신상품 파는 코너에서 맛보기 시식으로 제공하는 것들을 골라 먹는 재미에 빠졌다. 미국산 수입 소고기를 파는 매장 앞에서 고기를 구워 시식하는 코너에는 사람들이 30명은 넘게 줄을 서서 기다리기까지 한다. "저렇게 줄을 서서라도 시식을 해봐야 할 정도로 맛있으려나?" 하는 반감도 살짝 들기도 했지만 역시 소고기의 힘이 대단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맛있는 거는 체험적으로 안다는 반증이다.
시식용 음식을 집어들 이쑤시개를 아예 한 손에 쥐고 친구를 쫓아다니던 중, 건강식품 코너에서 독특한 제품을 만났다. 홍보 직원이 작은 종이컵에 담아 건넨 것은 '무취 무맛'의 액상 비타민이었다. 직접 마셔보니 정말 아무런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각적 즐거움이 전혀 없는 이 제품을 사람들은 왜 찾는 것일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이는 향이나 맛에 예민한 이들이 평소 즐기는 샐러드나 음식에 섞어 먹을 수 있도록 개발된 제품이라고 한다. 음식 고유의 풍미를 해치지 않으면서 영양소만 영리하게 보충하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조력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특정 수요층에게는 혁신적인 제품이겠지만,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대중에게 보편화되기엔 다소 장벽이 있어 보였다.
흔히 "맛과 향은 기억이다"라고 말한다. 이를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맛과 향은 철저히 '화학적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시각이나 청각이 빛과 소리의 파동을 감지하는 물리적 감각이라면, 미각과 후각은 외부의 화학 분자가 직접 우리 몸의 수용체와 결합해야 성립되는 감각이다. 맛은 혀의 미뢰 세포에 음식 분자가 닿아야 하고, 향 역시 향기 분자가 비강 내 후각 상피에 도달해야 비로소 인식된다.
이러한 화학적 반응은 뇌에 매우 강렬한 각인 효과를 남긴다. 가끔 TV 여행 프로그램에 전갈이나 굼벵이, 애벌레 튀김 같은 것을, 인상 찌푸리며 먹어보는 체험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억지로 입에 넣고 씹으면서, 고소하다 달콤하다 등, 맛과 냄새에 대해 표현을 한다. 가만히 보면 먹는 대상을 놓고 오감이 모두 작동한다. 꿈틀거리는 시각적 현상과 씹을 때의 아사삭 소리와 씹고난 후에 뭉클거림의 촉감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며 하나의 경험을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특정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대개 시각적 선입견이 지배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단 그 '화학적 장벽'을 넘어서면 새로운 기억의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된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사례는 흔하다. 홍어나 청국장처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음식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음식들은 맛과 냄새가 뇌의 보상 회로를 자극하여 '인이 박힌다'는 표현처럼 강한 중독성을 만들어낸다. 한 번 그 맛의 논리를 이해한 뇌는 그 쿰쿰한 향을 불쾌함이 아닌 '그리움'의 신호로 재해석한다. 감각이 기억의 영역으로 완전히 편입된 순간이다.
반면, 감각의 예민함이 고통이 되는 경우도 있다. 감칠맛의 대명사인 MSG에 대한 논란이 그렇다. 일부 사람들은 MSG가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입안이 마르고 소화가 안 된다며 극심한 불편을 호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실제 성분의 유해성보다는 심리적 기제인 '노세보 효과(Nocebo Effect)'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성분을 알 수 없게 한 이중맹검실험을 해보면, MSG와 증상 사이의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찾기 힘든 경우가 많다. 우리의 지각 시스템은 '이것은 몸에 해롭다'는 믿음 하나만으로도 실재하는 통증과 불편함을 만들어낼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화학 물질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다중화학물질과민증(MCS)' 환자들도 존재한다. 이들은 아주 미세한 향수 냄새에도 질식할 것 같은 공포와 고통을 느끼며 외출조차 포기하곤 한다. 흥미로운 점은 임상 시험 결과, 이들의 실제 후각 수용체 민감도는 일반인과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차이는 코가 아니라 뇌에 있었다. 냄새라는 신호를 받아들인 후, 그것을 위험 신호로 증폭하여 해석하는 '지각의 프로세스'가 남들보다 과하게 활성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명한 임상 실험 결과가 있다. 1886년 미국의 이비인후과 의사인 존 놀런 맥켄지 박사가 장미로 인한 알레르기 비염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여성환자를 진료 중이었는데 이 여성은 장미 근처에만 가도 심한 재채기, 호흡 곤란, 콧물 등 전형적인 알레르기 증상을 보였다. 이 증상이 단순한 물리적 알레르기 반응인지 아니면 시각적 자극에 의한 심리적 반응인지 확인하기 위해 조화를 준비해 환자에게 보여주었는데 환자는 심한 재채기와 함께 호흡 곤란을 일으켰지만 그것이 가짜 꽃임을 밝히자 환자의 증상은 금방 사라졌다. 이후 이 여성은 심리적 기제를 이해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진짜 장미 향기를 맡아도 예전만큼 심한 증상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느끼는 감각의 상당 부분은 외부의 자극 그 자체가 아니라, 뇌가 과거의 기억과 정보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감각의 90% 이상은 지각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감각 기관이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복사해 온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뇌가 그린 '정교한 가상현실'을 살아가는 것에 가깝다. 꿈속에서 맡는 향기나 느끼는 촉감이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뇌는 환청, 환촉, 환후를 얼마든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있을 때 느끼는 감각이 현실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외부 입력값과 뇌의 예측이 일치하기 때문일 뿐이다. 뇌가 그것을 '현실'이라고 낙인찍는 순간, 그것이 실제 분자에 의한 자극인지 뇌가 만들어낸 환상인지 구분할 방법은 없다.
뇌가 재구성한 맛과 향기를 우리는 '기억'이라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코스트코에서 보았던 '무취 무맛'의 비타민은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마케팅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맛과 향이라는 직접적인 단서를 제거함으로써, 오히려 소비자에게 그 제품의 기능적 순수성을 뇌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경험할 수 없는 맛을 통해 더 선명한 기억을 남기는 방식이라니, 인간의 뇌라는 존재는 참으로 오묘하고도 알 수 없는 존재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