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누적 관객수가 1,500만 명을 넘어섰다. 천만 관객 시대를 넘어선 이 압도적인 수치는 결국 잘 만든 영화는 관객이 먼저 알아본다는 단순하지만 명징한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일순, 마케팅의 승리일 수도 있지만,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화려한 홍보 이전에 작품이 지닌 진정성이다. OTT 플랫폼의 범람으로 영화관이 위기라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극장의 존재 이유는 영화의 품질과 품격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관객들은 언제든 영화관으로 향할 준비가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시대정신을 날카롭게 반영하여 공감의 장을 마련하고, 양념처럼 스며든 감성이 관객의 심연을 건드릴 수 있느냐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어제 개봉한 영화 한 편이 묵직한 울림으로 눈길을 끈다. 바로 '류이치 사카모토 : 다이어리(Ryuichi Sakamoto : Diaries)'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는 한 예술가의 생애 마지막 기록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2024년 NHK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Last Days 류이치 사카모토 마지막 날들'을 바탕으로 하고 미완성 음악이나 영상 등 새로운 서사를 가미해 지난해 11월 일본에서 먼저 공개했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전자음악의 선구자이자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평가받으며, 환경과 평화를 외치는 운동가로도 활약해 온 전방위 아티스트다. 그의 삶은 소리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해 온 과정이었다. 하지만 2020년 6월, 암 재발 판정을 받는다. 그해 12월, '시한부 6개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은 바로 이튿날 전 세계로 송출되는 온라인 콘서트를 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흔들리는 생생한 심적 기록을 다이어리에 써 내려갔고, 그 펜촉 끝에는 생의 마지막 고동이 고스란히 뛰고 있었다.
영화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면한 순간부터 2023년 3월 숨지기 이틀 전까지의 모습을 담담하게 담고 있다. 오선지 위의 삶과 일상의 삶을 어떻게 조화롭게 연주해야 하는지, 그리고 마침표가 예고된 인간은 흐르는 시간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숭고한 물음을 던진다. (나도 아직 이 영화를 못 봤다. 개봉 소식을 듣고 온라인에서 예고편만 본 상태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뉴욕 자택 마당에는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다. 지붕도 벽도 없는, 오로지 자연과 맞닿은 야외 공간이다. 이는 피아노라는 인위적인 악기를 자연의 상태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그의 마지막 실험이다. 비와 바람, 그리고 강렬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나무와 금속이 서서히 풍화되는 과정은, 예술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육신이 자연의 시간 속으로 침잠해 가는 모습과 닮아 있다. 마당에 놓인 이 피아노는 그의 에세이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에서 던진 근원적인 질문과 그 궤를 같이한다.
생의 마지막 숨결이 잦아드는 순간까지 음악을 손끝에서 놓지 않았던 이 음악가는 유독 빗소리를 사랑했다. 영화 속에서 흐르는 피아노 선율은 마치 정제된 빗소리처럼 들린다. 보름달이 뜬 밤 위로 투명한 비가 내리고, 그는 그렇게 세상을 응시하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제 남겨진 우리에게 자신만의 보름달 숫자를 세어보고, 귀를 기울여 빗소리를 들어보라고 권유한다. 자연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상대적으로 흐르기에, 그 유한한 시간을 진정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는 강권이자 따뜻한 조언인 셈이다.
시간을 내서 영화관으로 가야겠다. 거장이 남긴 마지막 일기장을 함께 들여다보며 삶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 있으시면 손을 들어주시라. 혼자 영화 보러 가는 게 청승맞아 보일 텐데 동행해 주신다면 기꺼이 환영한다. 물론 영화표는 내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