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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ug 26. 2020

완장의 무게

아무에게나 완장을 채워주어서는 안된다

권력과 권한을 가진 사람을 비유적으로 말할 때 '완장 찼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팔에 감는 완장은 눈에 잘 띄기 때문에 멀리서도 쉽게 구별할 수 있어 공개적으로 그 사람의 소속과 역할을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됩니다. 학창 시절 교문을 지키던 선도부 완장에서부터 취재현장을 누비는 '보도'완장도 있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국개의원 완장도 완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완장(脘章)의 완자는 밥통 완자이고 장자는 글 장자입니다. 참 절묘한 표현의 단어가 아닌가 합니다. 완장의 물리적 형태가 곧 권력과 생존을 의미하는 밥통이니 말입니다.


이 완장의 절묘한 기능에 대한 소설이 80년대 초반 윤흥길 작가의 '완장'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소설의 인기를 업고 89년에 MBC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조형기의 열연으로 한층 빛난 드라마이기도 했습니다. 동네 건달이 낚시터 감시원으로 채용되어 완장을 차고 사람들에게 안하무인으로 행패를 부리는 역할을 했었죠. 한국 사회의 권력 의식을 해학을 통해 가장 잘 반영한 작품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소설에서도 등장하지만 '완장'은 묘한 힘이 있습니다. 샤우론의 절대반지입니다. 완장을 차는 순간 권력의 최면과 힘에 빠져듭니다. 왜 그럴까요? 어디서 그 기기묘묘한 힘이 나올까요? 사이비 음이온 팔찌일까요? 프라시보 효과일까요?


완장에는 두 개의 균형이 함께 부여됩니다. '권한'과 '책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두 개의 힘의 균형 중 하나에만 빠져들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바로 권한에 대한 유혹입니다. 타인을 제어할 수 있고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 찬 완장이 아니고 사회와 조직이 채워준 완장이기에 가능한 기능입니다. 그 완장에 쓰여있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사회와 조직이 허락해주었지만 상한선의 수위가 없다 보니 완장 찬 사람 마음대로 행해지는 경우로 변질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를 통해 완장 찬 목민관들이 어떻게 공직에 임해야 하는지 자세와 경계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만큼 완장의 무게를 이기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반증일 겁니다.


하지만 완장의 권한과 책임은 동시에 힘을 발휘합니다. 별개의 힘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완장을 채워놓으면 그 완장의 무게에 대한 책임감으로 무언가 해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완장의 권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참 묘한 관계의 상생입니다.


사실 이 완장은 꼭 사회적으로 드러난 문제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 이 완장은 항상 존재합니다. 인간관계에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역할의 다름속에도 있다는 겁니다. 식당에 손님으로 가면 손님이 완장이고 전철역 입구에서 마스크 안 쓴 사람은 전철을 못 타게 선별하는 일일 고용 어르신도 완장입니다. 


완장의 기능을 순기능으로 돌리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완장이 권력을 휘두르고 제한하고 막는 것이 아니라 조직과 사회가 굴러가는데 막힘없이 갈 수 있도록 막힌 곳을 뚫고 조율하고 먼저 선도해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로 완장의 기능을 재인식하는 겁니다. 그래서 완장을 채울 때는 대상이 그 완장을 찰 만한 사람인지를 제대로 평가해야 합니다. 완장을 찰만한 그릇인지 살펴야 합니다. 대부분 문제를 일으키는 완장들을 보면 그 완장을 찰만한 그릇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완장의 무게를 제대로 느끼고 이해하는 사람에게 완장을 건네주어야 그 역할을 수행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하기 싫어서 아무에게나 완장을 건네주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완장 찰 사람을 잘 식별해 내는 일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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