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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Feb 04. 2020

기억의 단서

'단서' '실마리' 'Clue'

단서(端 단정할 단, 緖 실마리 서)라는 한자가 조금 어려워 일부러 찾아봤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전개를 미리 알아챌 수 있는 근거, 실마리를 의미합니다. 실마리는 감겨있는 실타래의 첫머리라는 뜻입니다. 첫머리를 잡으면 줄줄이 그 몸체가 딸려옵니다.


생각과 기억의 떠오름이 바로 이 '단서'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에 시간이 쌓이면 경험했던 전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고 점차 주요 이미지만 기억 속에 저장해 놓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의 단서만 제공하면 그 단서 속에 숨겨져 있던 실타래 같은 사연들이 줄줄이 떠오르는 것이죠. 브레인의 저장 기능은 이처럼 놀랍습니다. 보고 느낀 걸 모두 저장하는 것이 아니고 키워드로 저장해 놓고 폴더를 열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기가 막힌 저장창고였던 겁니다. 당연합니다. 브레인의 용량은 1,400CC 정도입니다.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입력해 놓는다면 브레인은 지금보다 계속 커져야 할 것입니다. 뇌의 용적을 넓히고 넓히다 보니 주름이 생겼고 그 주름으로도 용량을 감당치 못하자 외장하드라는 컴퓨터를 만들고 정보를 브레인 바깥에 쌓기 시작했습니다. 브레인은 키워드라는 단서만 머릿속에 남겨 정보를 찾아가는 길라잡이 역할만 하는 효율성의 극대화로 진화를 했습니다. 정보를 찾아가는 단서의 제공은 브레인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중요한 트리거였던 것입니다.

"여행을 하고 나면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 속의 여행지는 차츰 희미해져 갑니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서랍 속의 사진 한 장에서 여행지에서 마주한 온갖 경이로움이 줄줄이 떠오릅니다. 외장하드인 유튜브에서 음악을 검색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색창에 어떤 키워드를 써넣어야 하는데 이 키워드의 단서를 어떻게 유추해 낼까요? 물론 유튜브에서는 지속성을 가지고 검색되는 키워드의 빅데이터를 활용해 분위기가 비슷한 곡들을 보여주기도 하고 일전에 검색했던 노래도 보여줍니다. 이 또한 선곡의 실마리가 됨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유튜브 빅데이터에 의존하기보다는 내가 지금 어떤 곡이 듣고 싶은지에 대한 감정이 우선합니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생 시절, 대학생 시절 등 과거의 흔적 속에 엮여있는 노래들을 주로 떠올리고 찾게 됩니다. 그럼 이 곡들은 어떻게 유튜브에서 검색될까요? 제목이나 가수, 그룹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데 노래를 찾아낼 리 없습니다. 바로 단서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자기 기억 속의 어떤 장면이나 노래의 한 음절만이라도 흥얼거리는 단서 말입니다. 저는 대학시절 듣던 곡을 선곡할 때는 학교 방송국 벽면을 차지하고 있던 LP판 꽂이를 떠올립니다. 장르별로 분류되어 있던 장면을 떠올립니다. 클래식과 팝송과 가요로 칸이 나눠져 있고 팝송은 가수나 그룹 이름의 알파벳 순서, 가요는 가수의 ㄱ ㄴ ㄷ 순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판돌이 시절에는 어떤 분위기의 어떤 곡이 어디에 있는지 손이 찾아갔습니다. 35년이 넘게 지났으니 희미해져 가는 잔상으로 남아있지만 말입니다. 빨리 적당한 곡을 찾아내는 게 판돌이의 능력을 좌우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 과거의 행적이 기억으로 남아 곡을 선곡하는 이정표의 단서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래의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도 곡의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도 우리에겐 '청년기의 추억'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기억의 단서'로 떠오릅니다. 바로 기억의 단서에도 '정서'가 작용한다는 겁니다. 나와 내 주변과 연관된 것이어야 단서의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마이클 잭슨이 어떻고 비지스가 어떻고 떠들어봐야 우리 기억의 트리거를 자극하지 못하면 노래 제목조차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노래와 연관된 어떤 사건과 사실들이 같이 묶여 있는 어떤 범주가 있어야 더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떠올리고 싶은 것만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범위 안에서, 내가 알고 있는 범주 안에서만 불러올 수 있습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떠올리는 것을 상상이라고 하지만 상상은 기억을 바탕으로 하지 않습니다. 상상은 기억을 뛰어넘는 새로운 창작의 산물입니다. 공상이기 때문입니다. 기억과 생각은 철저히 자기가 경험한 내용만을 인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생존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시간이 지났지만 떠오르는 단서가 있다는 것은 나의 생존에 그만큼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삶을 사는 '단서'로 존재해야 합니다. 삶에 항상 떠오르는 그런 존재로 남이 있을 때에만 서로의 의미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지금 이 순간 어떤 '단서'가 떠오르나요? 우리는 그런 단서들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실체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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