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Feb 03. 2020

행복 에너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온 지구촌을 벌벌 떨게 만들고 있습니다.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역대 유행 병중에는 1347년 페스트균으로 유럽 인구의 1/3이 사망했던 흑사병이 있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에 발병한 스페인 독감은 2년간 5,00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여 20세기 최대 재앙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자수가 1,500만 명 정도인 것에 비하면 전쟁을 뛰어넘는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이 스페인 독감은 한국에서도 740만 명이 감염되어 14만 명이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콜레라, 결핵, 말라리아, 후천성 면역결핍증 등이 지구촌에 살아남아 그 위세를 놓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유행병은 개개인이 아무리 위생을 철저히 한다고 하더라도 막는 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국가적 통제가 강력히 필요합니다. 발병의 원천을 차단하여 확산을 최소화시키고 백신을 개발하는 일 등은 정부 차원의 거시적 시각으로 접근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참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 그런 존재로 '산다'는 겁니다. 생명은 바로 미시세계에서 펼쳐지는 장엄한 생존투쟁의 결과물임을 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거시 세계의 시선으로 존재를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생명 현상 자체는 모두 미시세계에서 펼쳐집니다. 먹고 소화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미시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자기력과 양자역학의 부산물들입니다. 태양빛을 받아 광자를 전자와 이온으로 분해하는 광합성마저도 미시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들여다보는 미시세계를 통해서만 바이러스의 변형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철저한 개인위생관리로나마 바이러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야겠습니다. 아니 우리는 이 세계적 유행병의 현실을 버텨내야 하고 이겨내야 합니다. 사실, 이기는 거와 버티는 거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두 상태 모두 본인의 의지에 따라 견뎌내는 것은 같으나 이기는 쪽의 의지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버틴다는 것은 본인의 의지보다 외부 환경의 영향력이 더 클 때 힘겹지만 막고 있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약하면 무너져 내리겠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버티는 차원을 넘어 이젠 이겨내야 할 때입니다, 바깥 환경이 어떻게 바뀌든 말입니다. 그저 상황에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이젠 박차고 일어나 상황을 전환시켜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준비운동을 하여 몸을 예열시키고 맞서 나가야겠습니다. 단순히 바이러스로부터의 벗어남 뿐만이 아니라 삶 자체를 맞이하는 자세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려면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물론 에너지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날씨가 추우면 에너지는 화석 연료를 이야기하는 쪽으로 이해되기 십상입니다. 석유 석탄 더 나아가 태양, 바람도 에너지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물리적으로 위치 에너지인 카이네틱 에너지와 포텐셜 에너지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양자역학에 오면 시간을 에너지로 삼아 함수 계산을 합니다. 인문학적인 에너지는 다양한 긍정의 힘으로 묘사되어 사랑의 열정도 에너지로 표현됩니다.


결국, 에너지는 힘의 원천을 뜻합니다. 동물은 감각에 갇혀 있고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 이후 의미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에너지라는 단어에 부여된 의미에, 내재적 상상의 개념이 더해져 의미가 발전 변천됩니다. 빅뱅 이후 우주에 물질이 등장함으로 에너지는 부속 산물로 등장합니다. 물질의 크기에 따라 중력이 결정되지만 그 힘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 변화의 흐름이 힘의 크기를 결정하고 세상 만물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사물을 움직이고 분자와 원자를 움직이며, 전자를 돌게 합니다. 쿼크도 움직이게 합니다. 생명으로 들어오면 화학적 전위차로 인한 흐름이 에너지가 됩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 중 에너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에너지 합의 결실입니다. 에너지가 충만해야 행복을 누리고 가꿀 수 있습니다. 물질적 에너지든 감정적 에너지든 풍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이라는 개념은 형이상학적 관념이라는데 모호함이 있습니다.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저술한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의 행복을 "예외"적인 것으로 서술합니다. 일상이 아닌 예외적 상황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시급 1만 원짜리 근로자가 10억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면 그 행복은 오래갈 것이지만 연봉 5억 원 받는 사람이 복권 10억 원에 당첨되어봐야 그 행복은 별로 크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예외가 일상이 되어버리면 행복은 반감된다는 논리입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전개입니다. 

결국 행복은 무한대의 확률로 이루어진 삶에서 어떤 것들을 뽑아 조합을 시키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확률은 변화율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조건이 될 확률은 무한대의 가능성중에 하나라는 것이죠. "흔히들 행복은 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라고들 합니다만 그 문장의 속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인 삶의 조건인 먹고사는 생존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겁니다. 그 생존의 조건도 각각의 문화에 따라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기에 어떤 것이 정답일 수 없습니다. 정답이 없는 허무한 듯한 결론이지만 이것이 삶의 방편입니다.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되어온 과정을 보면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결론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러한 조건에서 그러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와 당장 현실의 시계에 맞추어 생활을 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 자신의 신체를 움직여야 합니다. 지금 이 공동체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잠깐의 여유와 뒤돌아볼 수 있는 잠깐의 회상도 가능합니다. 이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현재가 그만큼 중요하고 그 무엇의 우선순위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시간을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행복은 깨어있는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 때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수준을 높이는 일은 간단치 않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