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Jan 31. 2020

수준을 높이는 일은 간단치 않다.

오늘 아침 기온에 대한 체감은 어떠신지요? 다음 주면 벌써 절기상 입춘이어서 그런가요? 영상의 기온을 보이고 있습니다. 계절의 면모를 잃어버린 겨울을 찾아 나서야 할 판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변종이 기승을 부릴 만큼 겨울은 위세를 잃었으니 계절을 정의하는 온도의 수준도 조절해야겠습니다. 앞으로는 영하가 되어야 겨울이라 칭하기보다는 영상 10도 밑으로 되면 겨울이라 불러야겠습니다. 일말의 기우이자 이번 한 철에만 나타나는 특이현상이면 좋겠습니다.


추위와 기온의 수준은 지도에 그려놓은 등고선과 같아서 평면임에도 높이와 기울기를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상태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 기온이면 이 정도 현상이 나타나겠지" 하는 미래 현상 예측을 하고 이에 대비한 준비를 합니다. 옷을 두껍게 입고 모자와 장갑을 끼듯이 말입니다. 모든 현상을 생존에 대비시켜 해석하면 대부분 들어맞습니다. 대부분 그러하다는 것은 그렇게 예측되고 그렇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회학적인 수준'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수준'이라고 하면 모든 현상에 적용할 수 있는 높낮이일 겁니다. 자연현상에서부터 사회 구성을 하는 집단에 이르기까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중력의 법칙이 적용되는 모든 천체에서는 당연히 존재하는 '정도의 차이'를 일컫습니다.


인간사회에서는 '수준'을 여러 단어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수준(水準)'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가치나 등급 따위의 일정한 표준이나 정도"를 말합니다. 의미를 확대 해석하면 계급일 수도 있고 우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수준'이 좋고 나쁨을 나누는 선은 아닙니다. 양적인 개념도 아닙니다. 질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나 분명 '수준'을 이야기할 때는 높낮이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일 높은 단계의 '수준'이 어디까지, 얼마만큼인지는 구분할 수 없으며 제일 낮은 단계의 '수준'도 어디까지 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그 '수준'은 항상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둘을 놓고 비교하는 것이 '수준'의 표본은 또 아닙니다. 개념을 확실히 한다는 것은 이만큼 복잡한 검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수준'을 말할 때 적용하는 범위에서 주변을 둘러볼 기회가 오래전에 있었는데 바로 세월호 사건이 나던 2014년이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4월 16일이었으니 사건이 벌어지고 한 달 정도 지난 시기였는데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갔던 적이 있습니다. 세월이 오래되어 어떤 공연을 보러 갔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당시 상황만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안전불감증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는 좌석배정이 된 공연 초대장을 들고 갔는데 좌석이 무대를 중심으로 오른편 중간 좌석이라 무대가 대각선으로 보였습니다. 공연시간이 다가오고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편 좌석에 앉아있던 관객들이 우르르 객석 가운데 빈 좌석으로 옮겨 갑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정말 30명도 넘는 사람이 한꺼번에 약속한 듯이 좌석을 옮겨 갑니다.


물론 이 현상을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견해를 보일 수 있습니다. 그 정도 가지고 감히 수준을 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빈 좌석일 텐데 좀 더 좋은 자리로 옮겨 공연을 잘 보는 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치부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원래 앉았던 좌석이 본인들이 돈을 주고 구매했던지 초대권을 받았던지 했던 자리일 겁니다. 본인들의 좌석 권리는 바로 그 자리까지입니다. 중앙에 무대가 잘 보이는 자리가 비어있을지라도 그 자리는 본인들이 앉을 권리가 없는 곳입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는 커다란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의 수준이 그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을까요? 문화공연을 누리는 기회는 많지만 아직 어떻게 누리는 지는 소홀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준이라는 것은 쉽게 높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속적으로 접해보고 경험해 보고 의식이 바뀌어야 수준이 바뀝니다. 아직까지 우리의 문화 수준은 그저 겉멋만 든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나 그 공연 봤어" "그 전시회 봤어" 정도입니다. 그림 좋은데, 공연 멋진데 정도까지만 입니다. 그 공연, 그 전시회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얻었는지가 빠져 있습니다. 보고 느끼고 알기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연의 스토리를 사전에 찾아보고 전시회에서는 도슨트의 설명을 들어야 합니다. 수준의 지평을 넓히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관심과 시간이 투자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제각기 다른 눈높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한 차원 높은 '수준'을 향해 공부하는 것은 보기 좋은 모습임에 틀림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똑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자연은 누구에게나 24시간이라는 똑같은 시간을 부여했다고 위안을 하면서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적용하면 인간은 모두 다른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시계가 보여주는 숫자를 똑같이 살고 있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책을 읽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은 분명 잠자고 술 마시는 시간을 사는 사람보다 시간이 천천히 가기 때문입니다. '수준'을 높이는 하루하루가 될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관계를 묻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