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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Nov 12. 2020

권력은 '악마의 키스'인가?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서 권력 이동의 과정이 관심의 초점입니다. 힘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발악이 안쓰러움으로까지 비칩니다.  과거 미국 대통령들이 보여주었던 과감하고 현명한 결단이 있었기에 현재의 세계 최강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물러날 때를 알고 물러나는 뒷모습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트럼프는 추한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꼴입니다. 트럼프는 패자의 모습이 아닌 승자의 모습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가고자 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패배를 인정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모습은 패자의 모습이 아니라 공동 우승자의 모습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모르는 듯하여 안타까울 뿐입니다. 권력은 그렇게라도 차지하고 놓지 않고 싶게 만드는 악마의 키스일까요?


이러한 초유의 관심은 그만큼 권력이 모든 사람들의 생사 이탈권과 관계가 되기 때문일 겁니다. 직간접적으로 어찌 되었든 개개인의 삶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합니다. 그렇게 진화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지향점으로 하는 것은 동물의 본능입니다. 원숭이가 그렇고 사자 무리가 그렇고 바다의 돌고래 떼가 그렇습니다. 힘이 있다는 것은 곧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이며 그 힘의 곁에 있으면 더불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생명은 그렇게 생존을 유지해 왔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이후 농업혁명을 거쳐 군집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힘이라는 권력에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사회가 세분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사만 지으면 되고 쟁기를 만드는 사람은 쟁기만 만들어도 서로 교환을 통한 부가가치를 통해 사회가 조직적으로 굴러갔습니다. 여기에 재화를 좀 더 많이 가진 자들이 나타나고 여유 있는 재화를 바탕으로 권세를 차지합니다. 없는 사람은 여유 있는 재화를 빌려 써야 하고 이자를 내야 하고 종속이라는 굴레를 쓰게 됩니다. 그렇게 인간사회는 권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을 만들고 스스로 얽매이게 됩니다.


얽매어야 사회가 제대로 돌아갑니다. 바로 숫자에 그 숨은 비밀이 있습니다. 공동체 사회가 커지면서 통제가 필요해지는데 그 힘이 바로 권력과 연계되는 것입니다. 이 권력의 사이클은 사피엔스 이후 어느 민족 어느 집단에서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서구사회는 이 권력의 사이클에 정점에 있는 엘리트들이 좀 더 청렴하고 공정하고 대중을 위한 쪽으로 나아가도록 교육받고 훈련받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부정과 부패가 고개를 들고 나타나곤 합니다. 잡초의 싹처럼 돋아나는 부정과 부패의 유혹은 권력이 갖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속성입니다. 그 속성의 힘이 발휘되지 못하도록, 아니 권력의 부정의 힘이 긍정의 힘이 되도록 물꼬를 트는 일을 얼마나 사회가 잘 해냐느냐가 그 사회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지표가 됩니다. 2천 년이 넘게 왕권 집중제로 사회를 통제하고 이끌어온 한국사회는 그래서 뿌리 깊이 권력을 향한 집중 숭배가 자리 잡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권력을 부여받은 자,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가진 자들의 톨러런스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요구합니다. 공동의 선을 향하여 앞선 자들의 배려가 있기를 원하는 사회입니다. 권력이 낮은 곳을 향하여 칼로써 작용할 것이 아니라 관대와 균형과 포용의 도구로 사용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쥐어주고 권력을 유지시켜주며 권력을 빼앗을 수 있는 것도 국민이지만 주어준 권력을 내려놓게 하기 위해서는 선거를 통한 의사결정의 표현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투쟁과 피와 저항이 필요해지기도 하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권력의 자리로 가면, 옆을 보지 못하고 아래를 보지 못하는 기이한 사회로 전락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틀을 바꾸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틀을 바꾸어야 사회가 변합니다. 이 틀을 바꾸는 과정은 험난합니다. 기존의 틀에 있던 세력의 당위성에서 힘의 균형이 변해야하기 때문에 그 힘을 놓지 않기 위한 권력과 마주 서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회는 짧은 근대화 과정을 거쳐 오면서 무수히 많은 권력과의 투쟁을 겪어내 그나마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양분적인 개념의 틀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틀의 유연성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합니다. 틀이라는 것이 어떤 구도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규범이라고 할 때, 그 틀 자체가 유연성을 갖지 못하면 획일화된 이분법만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선거를 지켜보면서 그 이분법의 현장도 목도합니다. 융합과 통합, 포용의 사회를 부르짖는 바이든 당선인의 목소리가 그래서 남의 일 같지 않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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