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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Nov 13. 2020

배 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사회

출근하여 이메일을 체크하고 책상 위의 달력을 건너다봅니다. 오늘은 또 어떤 일들이 노정되어 있는지, 점심과 저녁식사 약속은 있는지 재확인합니다. 하루에는 하루의 일거리를 생각하고 일주일에는 일주일치 일거리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만큼 시간의 굴레는 삶의 보폭마저도 지배합니다. 시야를 넓히고 시선을 높이 볼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상에 얽매이면, 보이는 그만큼만 보게 됩니다.


가끔 기지재를 켜고 일어서 스트레칭을 하다 보면 파티션 너머의 직원들이 무엇을 하는지 엿볼 수 도 있습니다. 각자들이 보는 컴퓨터 화면이 모두 다릅니다. 같은 일을 하고자 모인 사람들의 공간인 사무실에서 조차 같은 화면을 보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것이 공동체 사회가 갖고 있는 특징이자 허상입니다. 공동체는 각자의 일에,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시너지를 모아 운영되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서로의 에너지를 조금씩 보태어 보이지 않는 방어벽을 치고 굳건한 사회임을 과시합니다. 감히 타인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갖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는 바로 생존이라는 궁극의 단어와 만나게 됩니다. 지구 생명 46억 년 동안 생명의 출현은 바로 "살아남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현재에 왔다고 해서 이 생존의 의미가 달라지진 않습니다. 생명은 과거 그 오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현재로 이동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연과 학연을 찾고 고향을 찾아 반가워하는 이유가 바로 이 생존을 위한 외연의 확장을 쉽게 하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관계가 있음을 연결시켜 놓으면 무언가 통하는 것 같고 공유하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쉬워지고 편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경계해야 할 대상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살아남는 방법에 있어 제일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공동체 내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속되지 못하면 배척당하고 왕따가 됩니다. 기어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라도 관계의 고리를 찾아내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내홍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 민족이 걸어온 과거의 역사가 우리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기에 없어지지 않고 스멀스멀 기어 나옵니다. 힘든 시기를 지나오면서도 그 힘듬이 나음의 바탕이 되지 못했습니다. 공동체에서 합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더 좋은 곳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 틀이 변하면 안 됩니다. "공동의 善"이라는 광장이 있어야 합니다. 이 광장의 폭과 깊이가 그 사회의 수준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사회의 수준은 어떻다"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6.10 민주화 항쟁과 광화문 촛불 시대를 거쳐오면서 저변의 수준은 높으나 우리 사회의 갖은자들의 수준은 이에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높은 수준이나 바깥으로 비치고 인식되는 수준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수준을 눈멀고 귀 닫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권력과 돈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고 사회를 존재하게 하는 필연이긴 하지만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대한 관점이 바로 '우리의 수준'인 것입니다. 현재 한국사회의 기득권 자재 중에 종종 안 좋은 모습으로 언론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동안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게 도덕과 윤리가 사라지도록 놔두고 방관해온 주변인과 사회에 원인이 있습니다. 어려서 사회교육과 도덕 윤리교육이 제대로 안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데서나 큰소리치고 폭력을 행사해도 용인해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되는 줄 알면서 커왔기 때문입니다. 돈과 권력의 신기루에 우리 사회가 매몰되어 왔습니다. 잘못을 지적하면 눈앞에 있는 돈이 사라질 것 같고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신분이 낮아질 것 같아 아무도 말하지 않고 외면해 왔습니다. 지금 바로 우리 사회의 수준입니다.

이제 돈과 권력의 힘이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 듯합니다. 소통의 수단들이 무제한적으로 확장되면서 이젠 감출 수 없이 드러나는 시대가 되다 보니 당하고만 있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마구 파헤쳐져 표면으로 드러납니다. 혼돈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강물을 건너가야 맑은 세상과 접할 수 있습니다. 이 혼돈의 시기가 혼란으로 정체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제의 시간으로 승화되어야 사회가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저 화풀이하는 정도, 그래 너희들도 당해 봐라 하는 정도의 폭로 수준입니다.


약자의 질투와 뒤에 있는 자의 시기심이 폭주하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의 사회입니다. 승자를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않는 원망의 사회, 물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자신이 우월하다는 자기 정당화의 르상티망이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가진 자, 앞선 자가 노블리주 오블리제를 제대로 실행치 않고 모범을 못 보였기에 반감이 감정의 기본으로 깔려있는 사회입니다.


"배 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인간 본성의 처절한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본능에 감추어졌던 악마의 속성이 제어되지 않고 스멀스멀 행동을 하는 사회문화적 현상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본모습입니다. 르상티망이 만연한 사회는 갈등과 불신이 무한으로 재생산됩니다. 바로 오늘 아침 신문 지면과 방송의 뉴스에서 들리고 보이는 대부분의 현상이 바로 르상티망을 조장하는 전형입니다.


이 저질의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사회적 공감과 제도의 개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숨만 쉬고 한탄만 해서는 사회가 한 치도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밝은 앞날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정화되고 우리 모두가 정의에 대한 공동의 선을 지켜야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근무하면 다시 크리스마스 전까지 한 달 넘는 기간을 휴업에 들어갑니다. 모든 직원들이 같이 나누는 고통의 분담이니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최소한의 에너지로 버텨내는 생존의 노하우가 '동면'에 들어가는 동물과 진배없습니다. 그렇게 한 겨울을 나면 좀 더 슬림해진 모습으로 다시 출근해 책상을 닦고 한 달 넘게 잠자던 컴퓨터를 켤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이 불금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주말을 맞는 기분은 다소 편안하고 즐겁다는 사실은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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