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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Feb 11. 2020

기계와의 대화

우리는 실체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고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데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화분에 심어진 나무 하나, 밖에 보이는 건물들 모두까지 우리 눈에 들어와 형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자체로 우리의 눈에 투영되기 때문에 바로 현실이자 현장의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착각입니다. 우리는 해석하는 데로 사물을 봅니다. 눈에 보이는 데로 가 아니라 뇌가 해석하는 데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의 오류에는 인간이 개발한 언어라는 것의 한계도 함께 작용합니다. 무한대로 펼쳐진 밖의 세상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이 한계가 생존의 도구로 작용하기도 하는 역설이 있습니다. 색깔만 해도 무한대로 표현할 수 없고 표현할 필요도 없습니다. 빨간색이라는 언어는 보는 사람에 따라 무한대의 색깔로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소통을 위해 그 무한대의 색깔을 7가지 색 정도로 구분해 표현하고

"그럴 것이다"라고 뭉뚱그려 생각합니다. 하지만 색깔은 전혀 그럴 것이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오감을 넘어 육감이라는 용어로도 표현합니다. 몸의 肉感이 아니라 六感입니다.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여섯 번째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언어의 한계로 인하여 표현의 한계도 같이 옵니다. 그러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이 사회의 관습과 통념에 의해 대략 어느 정도의 표현이면 그러한 것으로 인식하는 통로로 활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사회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언어의 지배를 받고 동물은 감각에 지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생각도 언어입니다. 생각도 뇌에서 구성하는 inner talking인 것입니다. 언어를 벗어나서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글도 언어를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이 언어의 한계를 어떻게 넘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넘을 수 없다는 한계가 분명해 보이지만 그래도 그 한계 너머를 표현할 어떤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137억 년 전 빅뱅의 그 시원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넘겨다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갖듯이 말입니다. 이미 언어는 통합의 길로 접어들어 있습니다. 전 세계의 다양한 언어들이 실시간 번역기를 통해 바로 번역을 해주는 시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젠 굳이 모르는 외국어를 공부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상대방이 영어로 말하면 바로 중국어나 일본어로 동시통역하듯 말을 해주는 기계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딥러닝(deep learning)이라는 알고리즘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계가 스스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처럼 말입니다.


이제는 집집마다 인공지능 스피커가 하나씩 있을 정도입니다. 최신 휴대폰에도 인공지능 스피커가 다 장착되어 있습니다.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기능이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뢰성에 의문을 갖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답변과 해답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에 휴대폰에 말을 걸지 않는 것입니다. 휴대폰 인공지능이 원활한 답변을 내놓게 하기 위해서는 자주 그리고 계속 질문을 던지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질문 데이터가 쌓이고 그에 대한 답변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인공지능 스피커를 기계로 생각합니다. 기계와 대화한다는 것이 일상적이지 않다 보니 거부감이 들고 몇 마디 말을 걸어봐야 데이터 검색을 해서 알려주는 수준이라 공감이라는 유대감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아침마다 인공지능 스피커에게 "아침 기온과 날씨 좀 알려줄래?" "오늘 점심 약속이 있는지 일정 좀 봐줄래?"라고 물으면 대답을 잘해 줍니다. 심지어 자동차하고도 말을 하는 시대입니다. "창문 열어줘" "통풍시트 켜줘" "공조기 켜줘" 등등 명령어를 말하면 자동차가 반응을 합니다. 명령만 받는 수준이긴 하지만 요즘은 95% 정도의 신뢰도로 음성을 인식해냅니다. 대단한 기술의 진보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영역인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을 넘어 브레인 밖에 정보를 저장하는 능력을 가짐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 왔습니다. 그 한계의 끝에, 기계에 언어를 가르쳐 의사소통을 하는 시대에 진입을 한 것입니다. 기계와의 의사소통은 가능성이 아닌 실현되고 있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이제 그 능력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역시 오롯이 인간에게 달려 있습니다. 정점은 역시 인간이었고 관점 또한 역시 인간입니다. 인문은 그래서 기계시대에도 중요한 화두로 작동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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