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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Dec 17. 2020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유

나흘째 영하 10도 주위를 맴도는 맹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한자릿수 영하의 기온으로 조금 올라 낮 기온도 영상으로 오른다고 하니 따뜻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적 덜 추움의 느낌을 받을 수 있어 다소 안심이 됩니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고 하지만 '없는 사람'에게는 추위보다는 더운 게 낫습니다. 적어도 바깥에서 잠을 자더라도 얼어 죽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연의 흐름은 참으로 인간적이죠. 더우면 덥다고 툴툴거리고 추우면 춥다고 악악거립니다. 인간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현상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 스트레스를 치환시키는 아주 교묘한 수법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아무리 싫은 소리를 해봐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추우면 어떻고 더우면 어떻습니까? 그 상황에 맞게 행동하고 순응하면 될 일입니다. 더우면 옷을 벗으면 되고 추우면 옷을 더 입으면 됩니다. 그것이 인간이 행동할 가장 원초적인 일입니다.


덥다, 춥다의 체감각적 표현은 오로지 온도의 높낮이에서 기인합니다. 온도에 민감한 인간의 간사함을 보는듯해 치사한 느낌도 듭니다만 자연환경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임을 요 며칠 영하의 기온 속에서 지내며 눈치채게 됩니다. 온도의 오르내림에 이토록 지배를 당하고 살고 있음을 말입니다. 4계절을 가지고 있다는 우리네 땅에는 그 미묘한 온도 변화에 적응한 생물들이 번성해 있습니다. 항상 덥지도 항상 춥지도 않습니다. 일정한 주기를 두고 지속적으로 온도의 높낮이 곡선을 따라 모든 생물이 적응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계절별로 특징 있는 자연현상은 항상 있어와야 정상입니다. 그래야 그 풍토에 적응한 온갖 생물이 맞춰 갈 수 있습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따뜻한 온도가 계속되면 생물들이 혼동을 가져옵니다. 추운 겨울을 대비해 솜털로 무장하거나 겨울잠을 자거나 생존을 위한 활동들을 해야 할 때인데 계속 따뜻해지면 생체리듬이 적응을 못합니다. 굴로 들어가야 할 곰이 계속 먹이활동을 해야 합니다. 가지 끝에 달린 씨방 안에서는 밖의 온도가 따뜻하니 꽃을 피워야 하는 줄 알고 움을 틔웁니다. 지금은 오히려 온난화로 인해 잠시 더 추워진 듯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진짜 추워진 것이 아니라 지구온난화로 녹아내린 북극해의 붕빙때문에 바다 수온이 내려가 그 찬 기운이 북반구 중위도까지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온난화의 역설입니다. 물론 한반도에는 겨울철 강해지는 제트기류가 북쪽 찬 기운을 품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기온의 속도조절을 하는 시기에 따라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인문학적으로 항상 제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간들은 눈치를 챘습니다. 평상시와 다른 행동양태를 보일 때는 반드시 무슨 변화가 수반됩니다. 바로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관심을 가지고 주시를 하게 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이율배반이 아닌가 합니다. 자연의 변화를 들여다봐야 할 이유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근거로 학습합니다. 당연한 논리입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드러나는 것이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 얕은 지식으로 행동하는 가식은 금방 드러나고 맙니다.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통섭'이 필요합니다. 깊이와 넓이를 함께 가져가야 합니다. 물론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꾸준히 관심을 갖고 깊이와 넓이를 추구해야 합니다. 작게 알고 좁게 알면 그만큼만 알게 됩니다. 한계를 뛰어넘고 영역을 넓히면 그만큼 많이 보게 되고 많이 알게 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 라는 자아'가 보입니다. 종교적 깨달음의 영역과는 다른 자기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감각의 지배를 받고 인간은 의미의 지배를 받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여 자아를 만들어 냈습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숫자와 공식으로 의미를 증명해내는 천재들의 덕분에 우주만물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자연과학에서 이야기하는 '뉴턴의 어깨에 앉아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한계, 글의 한계를 넘어야 하는데 그 경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 경계를 종교라는 형태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글은 선형적 유도체입니다. 쓰는 이의 의도대로 읽는 사람이 끌려갈 수밖에 없는 몰입을 유발합니다. 이는 다른 판단과 비판을 눈멀게 합니다. 가끔은 머리를 흔들고 다시 한번 읽어보고 날카로운 논평과 다른 의견을 수용해야 합니다. 의미의 한계를 그나마 경계선에서 엿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침 글은 의미를 담게 되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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