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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Dec 22. 2020

코로나 19, 장례식장의 풍경조차 바꾸다

코로나가 연말 분위기를 완전히 봉쇄해 버리고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로 상향 조정됩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한해 수고를 격려해야 할 산타클로스마저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확산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다면 기꺼이 참아내야 할 일임에도 1년 가까이 세뇌하듯 통제받는 듯한 느낌이라 개운치는 않습니다.


이놈의 코로나 19는 인륜지대사인 경조사의 풍경까지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경조사는 말 그대로 한 집단의 유대관계를 끈끈이 이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는 행사이자 의례입니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가까운 사람끼리 모일 수 있게 함으로써 그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고 유지하기 위한 힘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결혼식과 같은 경사야 시간을 미룰 수 있으니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고와 같은 조사는 전혀 예측할 수 없이 불현듯 찾아오는 유령 같은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풍습상 단지 3일의 시간만이 주어지는 관계로, 이 시간을 놓치면 상당한 결례로 생각되는 게 우리네 관습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19는 이 짧은 시간마저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가까운 지인과 관련된 부고에는 필히 조문하여 위로를 해야 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부고의 경우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찾아가 위로하는 것이 맞습니다. 슬픔에 잠겨있을 유족들을 위해 장례식장을 떠들썩하게 사람이 모여 슬픔을 잊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정서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19는 이 정서마저 들어낼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 대학 친구 녀석의 부친상이라 빈소에 다녀오긴 했습니다. 아예 조문을 받지 않는다고 명시된 알림장을 받긴 했지만 안 갈 수 없는 친구 녀석이라 빈소를 찾았는데 정말 조문객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가있었던 3시간여 시간 동안 조문객은 저와 같이 간 대학 친구 2명뿐이었습니다. 그나마 방문한 조문객한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지도 못합니다. 인사만 하고 대면시간을 최소화하라는 배려이겠지요. 유족들이 조문객한테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누가 누구를 위로해야 하는지 헷갈립니다. 조문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친구 녀석이 와줘서 고맙다고 답례품을 건네줍니다. 내 평생 조문 와서 선물 받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싸늘한 밤기운에 주차장까지 터덜터덜 걸어 나오며 바라 본 하늘의 별이 너무도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잠시 우두커니 서서 별을 바라보며 "세상사는 일은 참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관습의 의미마저도 바꾸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해서입니다. 어제와 오늘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그저 지나고 나면 비교하게 되고 후회하게 됩니다. 어제 뜬 태양과 오늘 지는 달이 오늘과 다르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물리학적으로 따지자면 수천조 분의 일만큼 각도가 차이가 나고 우주 질량의 곡률에 의해 휘어진 중력으로 인해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영향을 주었겠지만 인간과 같은 존재들의 입장에서는 무시해도 좋을 현상입니다. 1보다 0.0000000000001만큼 변한다고 해서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이며 어떤 영향을 줄 것이냔 말입니다. 눈 한번 깜박거리면 같아질 그런 현상으로 치부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결국은 언어의 지배를 받는 인간이, 생각조차도 언어의 지배를 받다 보니 생긴 현상의 이해였던 것입니다. 온갖 것, 보이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심지어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추상의 대상을 만들고 설정하여 그 속으로 끌려들어 갑니다. 바둑에서 말하는 자충수를 두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형국입니다. 바로 인간이 만든 언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늪"입니다


인간은 숫자를 만들고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에 날짜라는 숫자를 부여하고 의미까지 입혀 버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추상의 실체와 공간,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여 형상화시켰습니다. 바로 그 의미가 인간이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의미가 공유되어야 언어로서의 자격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의미가 부여되지 않으면 숫자든 단어든 뜻이 없어지고 생성의 이유가 없어집니다. 숫자 1,2,3,4,5에 의미가 없다면 쓰일 수 없습니다. 숫자 1은 "여러 개 중의 하나를 지칭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보다는 작고 0 보다는 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미가 공유되지 않은 1은 독자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의미를 함유하지 않은 1이라면 그저 그림 속의 디자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2일은 아무 의미 없는 날인 것 같지만 누군가에겐 중요한 의미로 다가설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생일일 수 있고 누군가의 만남일 일 수 있으며 누군가와 헤어짐의 날일 수 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의미가 부여되고 공유되는 것, 바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오늘도 수없이 많은 현상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러할 것이며 내일을 살 때도 그럴 것입니다. 의미를 부여하는 삶, 이것이 세상사는 일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내야 할까요? 긍정의 의미를 부여하면, 살고 싶은 시간의 하루가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겁고 행복한 의미를 부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무리 코로나 19로 꼼짝 못 하는 나날의 연속이 될지언정 쉬어간다고 생각하면 될 일입니다. 없으면 없는 데로 아쉬우면 아쉬운 데로 넘겨볼 일입니다. 냉장고 파먹기만 해도 한 달은 버틸 수 있을 듯하니 생활비도 줄이고 냉장고도 비울 수 있어 일거양득이라 생각하면 이 또한 참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어떻게든 지나갈 것이며 이 또한 버텨낼 것이기에 참으면 됩니다. 1년 가까이 이렇게 살고 있는데 그깟 앞으로의 반년은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시간이라 치부해 봅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옆에 그대 계시니 이 또한 기꺼이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옆에 있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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