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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Feb 13. 2020

반복

깨달음.

잊힘.

망각.

다시 심사숙고.

다시 깨달음.

다시 잊음.

또다시 면벽 정진.

또다시 감동.

또다시 망각. 

무한반복.

 

한번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크게 깨달았다고 해서 세상도 같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내 안의 감동이고 깨달음이기에 자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눈치채지도 못합니다. 자기가 감동받은 것, 깨달은 것은 아무리 설명하고 증명을 하려고 해도 타인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일 겁니다. 그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가 예수이고 부처, 그리고 몇몇 현인 정도입니다. 그만큼 깨달음의 전달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 전달 형태도 완벽히 그들이 깨달은 것을 전달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보편이라는 형식, 누구나 가지고 지녀야 할 것이라는 윤리를 통해서만 확산이 가능했습니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깨달음을 보편이라는 공통분모로 넓힌다는 것은 대단한 수준의 진보입니다. 그래서 인류 정신세계가 한 단계 올라서는 방편으로 종교가 큰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감동과 깨달음의 루트를 간접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로 영화관에 가서 감동적인 스토리의 장면을 보면 가슴이 끓어오르는 희열을 느끼기도 하고 공감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영화 속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여러 체험과 감동이 현실에서도 반영될 것 같은 격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하지만 몇 시간, 며칠을 그런 감동 속에서 행동하고 보낼까요? 아마 길어야 2~3일 가면 잘 갈 겁니다. 대부분은 하루만 지나도, 아니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 금방 잊힙니다. 한 달만 지나면 언제 무얼 봤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습니다. 감동에 흘렸던 눈물은 마른 지 오래고 그 가슴 떨림은 그저 계단 오른 후 뛰는 심장박동과 진배없습니다.


깨닫고 알았다는 것도 동일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도 부처도 먹고 마시고 똥 싸고 늙어가 죽었습니다. 죽임을 당한 자도 있긴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고 생명체의 하나였기에, 피해 갈 수 없는 본질 속에서 깨달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체로써 추구하고 갈구해야 하는 이상을 말했던 것입니다. 종교는 인본 제일주의의 표상입니다. 2500여 년을 암연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했던 함정이기도 했습니다.


깨달음은 인본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노자나 장자처럼 자연의 숨결을 읽어내는 것도 깨달음입니다. 결국 세상 모든 것에서 깨달음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있음에 감사하는 것,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하는 것, 아주 하찮은 것 같지만 바로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뒤돌아서면 숨 쉬는 것을 잊고 살고, 걷고 움직이는 것조차 무의식으로 되돌리기도 하지만 다시 경각심을 가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숨 들이쉬며 다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계속 반복해서 말입니다.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도 반복해서 다짐할 일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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